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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Sep 30. 2023

떼어 내고 잘라 주고

아픈 기억은 과감히 '데드헤딩'하기

연휴인데, 연휴 아닌 연휴


정말 오랜만에 일을 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휴일이다. 명절에게 감사를 해야 할 판이다. 고등부는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지만, 중등부는 2학기 1차 고사가 끝난 상태이다. 우리 학원은 법정 공휴일은 쉬고, 재량휴일은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90% 이상의 아이들이 재량휴일에 오지 않으면 그날도 휴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꽤 긴 시간, 뜻밖의 귀중한 휴일이 생겼다.

그런데 내가 쉬면 당연히 조카들도 쉰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추석 연휴 하루 앞날도 학원을 빼고 아침부터 밤까지 마음껏 놀고 있는 조카들. 삼시 세끼 밥을 차리느라 어머니는 이 휴일이 반갑지 않은 눈치. 하루 종일 음식 만드시더니 음식 차리고 치우고. 오히려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연휴가 지겹다고 하신다.

벌써 토요일. 황금 같은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미리 주문한 책을 틈틈이 읽고 있다.


원예의 순기능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 치료사인 수 스튜어트 스미스(Sue Steart-Smith)는 그의 저서 <<정원의 쓸모>>에서 분노, 애통, 좌절을 승화시키거나 창조적으로 표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원예'라고 설명했다. 흙을 파고,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는 일이 모두 파괴를 통해 성장을 북돋는 돌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 김마리아, <<너의 심장 소리>>


제주대학교에서 원예를 전공한 저자는 이미 자녀들이 있는데도 심장이 아픈 아이를 입양해서 예쁘게 키우고 있다. 심장이 아픈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심장 소리가 났다고 한다. 아이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수술도 몇 차례 받고 부모님의 수많은 눈물과 간절한 기도 속에 건강을 되찾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고.

사계절 정원에서 피는 꽃들과 입양한 그레이스의 예쁜 사진이 실려있는 책이다. 책을 읽다가 나를 사로잡는 문장을 만났다. 바로 위에 소개한 문장인데, 원예가 가진 힘이 그렇게 큰 지 미처 몰랐다. "분노, 애통, 좌절을 승화시키거나 창조적으로 표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원예'"라고 하니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와 동생이 화초를 왜 그렇게 열심히 가꾸었는지. 본인은 몰랐겠지만, 아마 마음속 분노, 애통, 좌절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 아침 테라스 텃밭에서 어머니가 수확한 파!

장날이 되면 자잘한 화분과 꽃들을 사 오는 동생. 꽃이 피어나면 기분이 좋다며 탁자 위에 놓인 꽃나무를 날마다 쳐다보고 물을 주고 말을 거는 어머니.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집에 화분이 넘치는데도 왜 계속 사 올까? 궁금했는데, 현관 앞에 줄줄이 놓인 꽃나무가 이제야 수긍이 된다. 이혼 전, 복잡한 심경과 어지러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동생은 화훼기능장식사 자격증을 땄다. 자신도 모르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구나. 이러고 보니 우연이란 없는 듯하다. 그 아이의 아픈 마음을 신께서 만지셨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자잘한 행복 중 하나는 테라스, 플라스틱 통에서 파를 재배하는 일이다. 파 한 단을 사서 뿌리를 잘라 심는다. 그러면 그 속에서 새로운 촉이 생긴다. 뿌리가 영양분을 다 주고 시들어가면 밑단을 잘라 뿌리는 버리고 새로 자란 파를 수확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데드헤딩


예전에 설명한 마당 텃밭에서 따온 채소들. 버섯은 어머니가 사서 꼭지 따고 자체적으로 말리는 과정.

"데드헤딩이란, 한껏 만개한 꽃들 사이사이에 이미 시들어 버린 꽃이나 잎들을 떼어 내고 잘라 주는 작업을 말한다."

- 김마리아, <<너의 심장 소리>>


여름 정원에서 특히 필요한 일이 '데드헤딩'이라고 한다. 사실 난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받으면 시들어 버린 꽃이나 잎조차도 아까워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나머지 꽃이나 잎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미 시들어 버린 꽃이나 잎들을 부지런히 떼어 내고 잘라 주어야 한다니...

사람도 그렇겠지만, 자연 또한 아픔의 과정을 거쳐야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니 신기하다. 추석 연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랜만에 밥을 먹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어도 다 개성과 가치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때로 한 가지 사안에 의견 충돌이 생기고 삐치고 상처가 생긴다. 그 상태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살면서 시나브로 쌓인 아픈 과거의 기억들 또한 언젠가는 내보내야 한다. 떼어 내고 잘라 주는 작업이 인생에도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행복

선물 받은 꽃다발에서 장미 하나를 빼서 말리고 있다.

가족이라고 다 뜻이 맞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일터에서 일한다고 늘 동일한 생각을 가진 게 아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자라온 환경도, 추구하는 가치관도. 그래서 때로 부딪치고 아프고 상처받고 힘들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데드헤딩'을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 있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나의 행복은 선물 받은 꽃다발에서 장미가 완전히 시들어가기 전에 온전한 꽃잎을 한 장 떼어 아끼는 책이나 지금 당장 읽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완독 하고 싶은 책 속에 살짝 숨겨두는 것이다.


원래보다 조금 작아진 꽃송이를 거꾸로 매달아 말라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장미가 시들어가는 과정도 다채롭다. 노을이 하나의 색으로 단정할 수 없듯이 핑크에 오렌지, 노랑이 섞이고 갈수록 짙어진다. 부드러운 꽃잎이 조금씩 굳어진다. 노화의 과정과도 비슷하다. 서서히 굳어가지만 깊어지고, 수분은 줄어들지만 형태는 단단해진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모든 순간이 다 완벽하지 않아도. 육체는 쇠약해지는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어도. 우리는 더욱 깊어질 수 있고 단단해질 수 있으니. 열린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이 바람 한 줄기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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