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부일 수 있다.
보자기 덮개 아래 여러 뚜껑들
어머니는 전통적인 여인이다. 다른 말로 보수적이고 윤리적이고 교육적인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외출하기 전에도 식구들 밥 걱정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상차림을 봐두는 편이다.
예전에는 조금 촌스러워 보였던 보자기 덮개를 열었다. 하나는 구멍 뚫린 채반으로, 다른 것은 본래 용도를 알 수 없는 뚜껑을 덮어두었다. 조금 시든 것처럼 보이는 아삭 고추와 깻잎, 상추가 뒤섞여 있다. 거창한 호텔식 조식이 아니어도 어머니 손길 닿은 음식이 상에 가득하다.
밥상에도 그녀가 보인다
도시락을 챙겨 다니는 어머니는 가게에서 남은 밥을 가져올 때가 있다. 이웃집에서 나눠준 채소나 덤으로 얻은 반찬도 알뜰하게 활용한다.
미식가도 음식에 큰 욕심도 없는 나인지라 반찬 투정은 잘하지 않는다. 다만 육류를 안 좋아하기에 고기가 올라오면 기분이 다운(?)되는 경향은 있다. 위층 아주머니가 군부대 반찬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데 떡갈비와 소시지를 잔뜩 챙겨 와서 동생에게 건넨 모양이다. 어머니는 없어서 못 먹는다며 반가워하시며 우리에게도 먹으라고 데워주었다. 그 성의를 봐서 입에 몇 번 대었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부족한 맛은 양념 추가로 재변신!
사춘기 아이들처럼 우리는 때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외모나 성격, 능력치나 인간관계 등. 여러 부분에서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해질 때, 마법의 양념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밖에서 나온 반찬이 뭔가 부족하다 싶거나 식구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 때는 조리를 다시 한다. 심심한 맛에는 매실액을 추가하여 감칠맛을 더하거나 간장을 조금 넣어 다시 볶거나 하면서 새로운 맛을 추가한다. 그러면 새로 만든 음식처럼 맛이 살아난다. 겉으로 봤을 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맛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인생
동생과 나, 단 둘 뿐이라 그렇게 치열한 경쟁은 없었다. 내 옷이나 귀걸이를 동생이 착용하고 잃어버리거나 친구집에 두고 와서 다툰 일은 있다. 서로 드라이기를 먼저 쓰겠다고 티격태격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음식으로 싸울 일은 적었다. 어머니는 항상 각자의 몫을 따로 챙겼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식사 시간을 놓치거나 늦게 상 앞에 앉아도 각자의 몫이 남아있었다.
평소 비싸서 그림의 떡이었던 블랙체리를 마트 간 김에 큰 마음먹고 한 팩 샀다. 예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빛깔에 마음을 빼앗기고, 시력이나 심장과 신경계 등 효능이 많아서 좋아하는 편이다.
"이건 네 몫이다!"
평소 사지 못했던 과일을 사 와서 식초로 헹구고 통에 담은 과일을 건네며 어머니가 말했다. 앞에서 밥뚜껑으로 쓰였던 덮개는 접시로 재활용되었다.
우리 인생도 때로는 자신의 몫조차 챙길 여력도 없이 이리저리 치이지 않나?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살아야 하고, 저렇게도 살아야 한다. 억울할 때도 있고 그 속상함을 어디에 털어놓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할 때도 많다. 하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고, 숨을 크게 들이마쉰 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 시간도 마냥 헛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기에 맞이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별 다를 게 없어도 이런 순간이 쌓이고 쌓여 내공이 되고 자신만의 캐릭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못 먹는 체리일지언정 어쩌다 한 번 맛보면 그 소중함을 더 깊이 알 수 있듯이. 맞이하고 싶지 않은 억울함과 속상함도 언젠가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 '나'라는 보석이 세공되는 시간이 되리라 감히 믿는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힘을 다질 수 있다. 마음에 품고 꿈꾸고 걸어가다 보면 그 꿈이 눈앞에 다가오고, 손에 잡히고 꿈을 이루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 이 순간, 이 삶을... 오늘이라는 이 하루를 전부인 양 붙잡고 갈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시시한 일상이 전부일 수 있는 것은 사랑 깃든 밥상과 글을 쓰는 지금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