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과거로, 새것이 필요한 순간
어머니는 딸의 속옷을 물려 입는다. 예전에는 후배들이 선배들이 입던 교복을 물려 입거나 교과서나 참고서를 받아서 재활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딸이 입던 속옷을 입는다. 구매는 다 돈이므로 빠듯한 살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것이리라.
"이거 늘어나서 더 이상 못 입겠다."
구멍 난 양말도 몇 번이나 꿰매어 신는 어머니가 웬일인지 속옷 타령이다. 재활용 속옷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서 불편하신 모양이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마트에서 새 속옷을 사 오셨다. 속옷 따라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이 있으니 바로 밥그릇이다.
동생네는 아래층에 살기 때문에 수시로 우리 집 그릇이나 접시가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내려갔으면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내려가서는 함흥차사! 살림에 민감한 어머니는 수저나 그릇도 제자리에 없으면 답답해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도대체 제대로 있는 게 뭐야?"
갱년기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가끔씩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 속상함이 큰 것 같다. 그랬던 어머니가 새 속옷을 사며 개인용 밥그릇을 줄줄이 사 왔다. 전자레인지에 사용할 수 있고 냉동실에 넣을 수도 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지난주 일요일 저녁, 그 용기에 식구들의 밥을 담아 상을 차렸다. 이제는 속이 좀 시원해지셨을까?
아직 철부지 딸은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머니는 살림살이를 장만하면 좋아하신다. 들기 편한 프라이팬. 반찬 그릇은 사고 사도 또 사고 싶어 하는 눈치. 다이소에서 산 수저도 동생네에 갔는지 보이지 않자 속상해하는 모습. 자주는 아니어도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이 식사하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칠순 지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 아프다고 하시는데... 그 마음 하나, 소원 하나 들어드리지 못하고 식기조차 제자리에 두지 못한 딸은 죄송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무조건 사라고 부추긴다.
한평생 노름쟁이 아내로, 자식 안 굶기려고 고생만 한 사람이다. 언제 한 번 호강 좀 시켜드릴까? 내 인생에 호강이라는 것을 어머니께 안겨드릴 수나 있을까? 중년의 딸도 같이 나이 들어가며 여기저기 몸에 신호가 온다. 6개월 만에 산부인과 가서 초음파 검진한 결과는 암울하다. 이제는 내 몸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지만, 아직 살아있기에 무조건 감사하기로 한다. 한 번씩 배가 쿡쿡 찔러도 큰 불편함은 없다.
지나간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것이다.
"무언가 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지 않아야 될 것을 안 하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몸에 해로운 것을 멀리 하고 운동에 진심을 담고자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분명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리라 믿으면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래도, 아직은 할 일이 있다. 챙겨야 할 가족이 있다. 그렇다면 함께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애정을 쏟아보자. 대충 넘기지 말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다독이며, 신경을 써보자. 그럴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