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번민"에 시달려도
"뭐 이런 걸 다 찍냐? 이거, 남들 다 하는 건데..."
어머니의 말에 대꾸한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똑같아요? 글이 다른데...
같은 메뉴의 음식이라도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따라 글이 달라지잖아요."
막상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안다. 흔한 음식,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을. 따지고 보면 아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이고, 곁에 계시고, 늦은 밤 매캐한 고추향으로 기침하면서도 딸의 입맛을 당기는 사람. Only one! 오직 하나!
"어머니 없는 사람 서럽겠다. 또 올리냐?"
하는 어머니 말에 "저는 이게 다예요!" 응수하는 나. 말 그대로 이게 다다. 노름꾼 남편으로 기찻길에 서 있다 온 여인과 창밖 소나무를 바라보며 신에게 왜 인간으로 만들었냐고 따지던 십 대 소녀. 우리는 지옥을 경험한 바 있는 인생 동지니까 서로에게 전부가 되기도 한다. 부모의 분신이라는 자녀. 맏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버지란 사람의 됨됨이를 눈치채고 싹수가 노란 잎에 희망을 버렸다. 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웃을 수도, 어머니 반찬을 보며 감탄하는 일도 없었을 터. 그래서 당당히 "이게 다예요!"란 말로 어머니께 말대꾸하며 야식을 먹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스며들어야 하는 거야. 요리를 할 때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지듯이."
-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중에서
누군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왜 이렇게 타락한 세상과 악독한 놈들을 보고서 조용하냐고, 신이 살아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머니와 지옥을 거쳐왔는데, 때로 그 답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지나고 보면 눈물 한 방울, 공허한 한숨 한 조각조차 버림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기름을 두르고 어묵을 볶다가 썰어놓은 고추가 들어가면 기침 시작. 알싸한 향이 온 집안을 감싼다. 닫아둔 창문을 다 열고 선풍기를 튼다. 고추가 들어가는 것과 안 들어가는 것은 천지 차이. 칼칼하면서도 감칠맛이 더해진다. 그냥 이름만 향신료가 아니라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식재료.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마음속 영웅 살만 루슈디는 자신의 대표작에서 요리를 할 때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지듯이 인생도 서로 스며들어야 하는 거라고 역설한다. 그 자신 또한 피습을 당하고 한쪽 눈을 잃은 상황에서도 할 말은 끝까지 하는 인생 고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묵을 볶고 난 프라이팬에 남은 밥 넣고 깨 뿌려 간장 볶음밥 만드는 어머니. 배고파서 이른 저녁을 먹은 나는 그녀가 귀가하자 또 폭식을 해버렸다.
어묵볶음, 오이생채, 가지나물 3종 세트. 어젯밤 폭식 후 오늘 오전 몸무게는 1kg 증가. 역시 먹는 대로 찐다. 정직한 몸처럼 우리 가정의 재정 상태는 마이너스! 책도, 굿즈도, 문구류도 사서 안 되는 상황이건만 연휴 전후로 펀딩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까지 아름아름 많이도 저질렀다.
누군가 페북에 쓴 내 글 읽고, <<사탄탱고>> 읽어보고 싶다길래, 선물로 한 권 더 주문했다. 이런 식으로 사니까 행복하긴 한데, 돈이 늘 부족하다. 별다를 것도 없는 집밥이 윤작가를 만나 하나의 글이 되듯이. 평범하다 못해 일반적인 사람과 글이건만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재와 문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존재감 적고, 수녀처럼 조용한 소녀로 교실을 채웠지만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어른들은 생각이 깊다고 이야기했다.
<<한밤의 아이들>>에 나오는, 누군가 고의로 산부인과에서 바꾼 아기는 친모가 아닌 이를 친모처럼 여기며 살아야 했다. 그 주인공 살림이 수시로 들려오는 "한밤의 아이들"로 괴로워하고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해 혼자 끙끙거려도. "남들의 번민"에 시달리며 제대로 쉬지 못해도.
수시로 아버지가 아파 회사에 못 간다는 끔찍한 거짓말을 아버지에게 온 전화에 그 대신 전달해야 할 때. 술, 담배 안 하는 아버지가 수시로 간식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켜 짜증이 나도. 언제 고함이라는 폭탄이 떨어질지 몰라 어머니와 숨죽여 살아야 했을 때. 내일도 없이 오늘 하루를 허탕하게 보내는 그가 한심하게 느껴져도 대놓고 욕하지 못할 때. 언제까지 저 인간을 봐야 할까 답답할 때도. 살았고 살아야 했다. 살림의 심정을, 머릿속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내게는 어느 정도 속을 이해하고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인생 동지가 있어 숨 쉴 수 있었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복잡한 세상에서 누군가가 털어놓는 수많은, 잡다한 일들로 피곤해질 때면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준다. 손님 대접하듯이 수저 받침대도 놓고 반찬도 일부러 예쁜 접시에 꺼내고 시간 좀 걸리고 불 조절 필수인 계란찜도 거하게 해 준다. 입가심으로 과일 몇 조각도 놓아준다. 그렇게 정성 다해 대접하면 존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땅은 혼자서 살아가기에 만만치 않다. 이제는 AI의 영향력이 커져 식당에서도 무거운 접시를 나르는 로봇이 등장했다. 전자 기기 없이 살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여러 모양과 갖가지 이유로 살기 위해 남의 고민을 듣고 해결해줘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인생 동지가 곁에 안 보여도.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위한 밥상! 한 끼를 대접하는 마음, 때로 우리에게는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