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수리'라는 현타!
영화 <엠마> 속 주인공 엠마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조건도 완벽하다.
높은 귀족 계급에, 아름다운 외모, 엄청난 부.
저런 캐릭터가 주는 묘한 쾌감이 있지. 다 가진 사람. 결국 잘 될 사람.
성격이 좀 모나면 어떤가. 결국 해피엔딩일텐데.
엠마 정도의 조건이면 저정도 허영심, 자만심, 교만함은 자연스러운 것일테지.
엠마에게는 일종의 '무수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마음껏 자신의 잘남을 뽐내면서,
'심지어 착하기까지한 귀족 아가씨' 놀이를 마음껏 즐기게 해줄 존재를 필요로 한다.
바로 가난한 고아 아가씨 '스미스'가 그 역할에 당첨된다.
가진 것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 '천한 계급'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애매한 경계에 놓인 인물.
나와 급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못어울릴 정도로 급이 확 떨어지지도 않는,
적당히 못나고, 적당히 애매한, 그런 인물.
엠마를 열렬히 찬양해줄만한 인물.
엠마는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제대로 한방 먹는다.
자신의 자만심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음을.
무엇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 왔음을.
그녀의 넘치는 자신감은 오히려 독이 되어 그녀가 거짓된 삶을 살아오게 만들었다.
매사에 당당한 자신감으로 임하던 그녀는,
정작 자기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무지하였다.
나 자신에 대한 무지함은, 나 한명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고,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두를 위기에 빠지게 만든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 사람도 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지금와서 생각하니, 나는 내가 '엠마'와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남에게 적당히 '잘난 척' 할 수 있으면서, 결국에는 잘 될 사람.
나는 내가 바로 그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았다.
엠마에게도 현타가 왔듯, 나에게도 현타가 왔다.
자신감으로 시작한 일들이, 결국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 넘치던 패기가 점차 좌절로 뒤바뀌는 순간들이 많아지면서....
한번도 주목해보지 않은, 그 무수리 같은 인물, 애매한 경계에 놓인 인물,
그 '무수리'가 바로 진짜 지금 나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나도 속이며 살아왔다. 내 자신을.
다 안다고, 다 할 수 있다고, 나는 결국 해내리라.
과한 자신감, 과한 자만심.
나는 '콩을 심어 놓지도 않고, 콩이 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 이었다.
나는 '씨앗을 뿌려만 놓고, 그 후 물도 주지 않고, 밭도 갈지 않으면서, 엄청난 수확만을 당연히 기다리는 그런 사람' 이었다.
그냥 자신감만 있었다.
진짜 타격을 받기 직전 도망쳤다.
그래서 진짜 타격을 받지 않았다.
진짜 실체를 확인하지 않았으니..
늦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늦겠지.
이제라도, 콩을 심자!
이제라도,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밭을 갈자!
엠마도 결국엔 허울뿐인 귀족이 아니라 '진짜'가 되었듯,
나도 '진짜'가 되기 위해,
내가 스킵해온 것들, 내가 만든 내 인생의 구멍들을 이제라도 찬찬히 다시 살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