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게 내민 내 손의 꺼끌꺼끌함
나보다 먼저 결혼과 출산을 마친 여동생에게는 현재 7살 아들 하나가,
나에게는 현재 4살 딸이 하나 있다.
한 동네에 살면서 1년에 최소 350일은 서로 함께 있기 때문에,
조카와 내 딸 아이는 친남매나 다름없이 자라고 있다.
코로나 시대 이후 나는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
여동생은 코로나 이전과 다름없이 매일 출근을 한다.
재택근무를 하다보니 나는 여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을 쓰기가 유동적이다.
그래서, 조카 육아의 공백을 친정 부모님과 함께 나눠서 메우고 있다.
친정 부모님마저 상황이 되지 않으실 경우에는,
내가 조카와 딸 아이의 육아를 동시에 책임진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기꺼이 즐겁게 조카 육아 공백을 채웠다.
여동생 부부는 상대적으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보니, 조카는 나와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나와 함께 놀러간 곳이 더 많다.
그런데 혼자 그 공백을 채우는 날이 많아지면서,
점차 처음의 좋은 마음이 날카롭고 예민하게 바뀌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여동생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내가 조카의 육아 공백을 담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생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물론 돈을 내고 도우미를 구하면 되겠지.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또 그럴만한 사정도 아니다.
내가 한 동네에서, 바로 옆에 붙어서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특별히 나에게 부탁을 하지 않아도,
조카의 육아 공백은 내가 메우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서로 암묵적으로 아니까.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을.
그러다 결국 한번 폭발을 했다.
내가 너 육아 도와주는 거 당연한거 아니다!
동생에게 거친말을 쏟아내고, 하다못해 너가 이럴때는 니 돈으로 계산을 해야하는거 아니냐, 뭐라도 사와야 하는거 아니냐, 니네 부부는 도대체 생각이 있냐, 조금이라도 어떤 감사의 제스쳐라도 취해야하는거 아니냐.. 등등 구차하고 치사해보이는 말까지 다 튀어나왔다.
한번 폭발한 이후, 동생은 어느정도 자각을 하고,
조금은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문제는, 나다.
그 후로, 나도모르게, 조금만 힘들어지면,
그렇게 티를 낸다. 나 힘든 티, 생색..
나 지금 엄청 힘든데 너 도와주는 거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내 눈빛, 말투 하나하나에 이런 '생색'이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옛날 이야기 중에 <조월천과 상사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주 간단하게 핵심적인 부분만 소개하자면,
'조월천'이라는 양반집 자제가, 자신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처녀'의 집에 찾아가서, 손에 '손수건'을 두르고 그 처녀의 얼굴을 쓰담는다. 처녀는 오죽 내가 싫으면 맨 손으로 날 안만지고 손수건을 대고 만지나 싶어서, 그 자리에서 죽어 뱀으로 변해 조월천을 죽이고 조월천 집안 삼대를 망하게 한다.
조월천은 처녀를 도와주러 간다. 그런데 '마지못해' 처녀를 찾아간다.
자기 때문에 처녀가 죽어간다니, 주위에서 하도 성화를 하여 어쩔 수 없이 처녀를 만나러 간다.
처녀는 조월천이 나타나자 너무나 기뻤는데,
조월천이 손에 손수건을 두르고 자기 얼굴을 만지자,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오죽 내가 싫으면 맨 손으로 날 안만지고 손수건을 대고 만지나 싶어서 '수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절한 복수.
방금전까지 너무나 사모하던 조월천이었으나, 상사뱀이 된 순간 조월천과 조월천 집안을 전부 망하게 한다.
자신을 도와주는 상대의 손길에서, '꺼끌꺼끌함'을 느낀 것이다.
아, 마지못해 나를 도와주는 것이구나. 싫은 티가 나는 구나... 나한테 오기 정말 싫었구나....
조월천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
기껏 처녀를 도와주겠다고 찾아갔는데, 괜히 손수건 두르고 상대방 얼굴 만졌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것이 진리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나의 손길에, 성심이 없고, '싫은 티', '생색',
'맨손'이 아닌 '손수건'을 덧댄 것 같은 꺼끌꺼끌함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남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상대를 도왔다고 여기지만,
상대는 수치심으로 상사뱀처럼 돌변하여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
기왕 도와줄 것이면, 티를 내지 말아야지....힘든 티, 싫은 티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이 몇번 있었다.
나는 상대에게 정말 잘해준 것 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어느날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유없이 공격당했다고만 여기며 억울해 하였다.
왜? 나는 널 도와주기만 했는데? 너 미친거 아니니?
한참 후에, <조월천과 상사뱀> 이야기의 서사가 와닿으면서,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 널 돕는 나의 손길이 너에게 수치심을 주었구나...
내가 맨손으로 다가가지 않고, 뭐 하나를 덧대고 다가갔구나...
상대에게 내민 나의 손이 '맨손'이 아니라, '꺼끌꺼끌'한 무언가를 덧대고 다가간다면,
사랑은 순식간에 '파괴적 힘'으로 돌변하다.
내 동생이 상사뱀으로 변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 상처가 어딘가에 쌓이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계속 상처를 준다면 나는 정말 멸망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조월천처럼.
가까운 사람일 수록 오히려 '맨 손'으로 다가가지 않고, 무언가를 덧대고 다가가기가 쉽다.
'생색'을 가득 장착하고!
너무 편하니까, 너무 익숙하니까, 너무 만만하니까.
그 가까운 사람이 어느날 갑자가 '상사뱀'으로 돌변해도,
억울해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뿌린 생색들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