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일기
느즈막히 일어나서도 계속 침낭 속을 뒤척였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아무 것도 하고싶지가 않군. 열한시가 넘어 겨우 몸을 일으킨 건 순전히 배가 고파서 였다. 베를린은 낫 수퍼노말하게(한 베를리너의 말을 빌리면) 좋은 날씨가 연일 계속 되고 있었다. 날씨를 확인해보니 흐리고 비오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런 날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가야한다. 모바일 지도를 켜 위치를 찾아보는데 어, 아르투네 식당도 이 근처네. 그 식당에서 밥 먹고, 컬쳐센터에 들렀다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가야겠다. 시간도 많은데 여유롭게 다니자.
왕년에 운영하던 바가 6개나 되던 남쪽 소도시 투틀링겐의 아르투는 2년 전에 만난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본 것 같은 내 친구다. 그는 오래 전에 베를린에 식당을 오픈해 운영하다가 여동생에게 물려 주었다. 베를린의 요식문화를 소개하는 매거진에 그의 식당은 아침식사가 유명하다고 소개되어있어 아침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브런치도 아니고 늦은 점심을 할 때 즈음에야 도착했다. 역에 내려 거리를 걷는데 아, 이 곳은 정말 현지인의 공간이구나 싶었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식당은 딱, 내 친구 냄새가 났다. 여동생이 조금 바꾼 인테리어를 빼곤 벽이며 의자며, 정말로 그의 취향이다. 그는 질감이 살아있는 우드톤을 사랑해서 그가 예전에 운영하던 바에 놀러가면 항상 벽이며 의자며 원목 아닌 게 없었다. 그는 우드톤으로 공간을 정리하며 빈티지한 멋에 세련된 느낌을 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베를린 Ostkreuz역 근처 그의 레스토랑은 딱 그런 곳이다. 빈티지한 히피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고급스러운 세련미를 잃지 않는. 분위기가 좋아보여서 들어섰는데 비쌀까봐 걱정하게 되는.
메뉴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았기 때문에 잉글리쉬 브렉퍼스트가 추천메뉴인 걸 알고 있었지만 여긴 영국이 아니고 독일이잖아. 다른 메뉴를 먹어보기로 했다. 아르투에게 추천메뉴를 물었지만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나 혼자 꽂혀 시킨 메뉴는 트러플 스크램블 에그. 트러플 버터와 오일을 더해 만든 스크램블에그에 훈제연어를 곁들여 먹는 메뉴다. 아아 말만 들어도 근사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함께 주문했는데 우유를 정말이지 딱 맞는 비율로 넣은 화이트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주셨다. 음식은 5분도 채 안되어 나왔던 것 같다. 너무 빨라서 놀라는 나를 보고, 긴 금발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올려 묶은 스텝이 웃으며 키친이 오늘 좀 빨라, 한다. 하긴 스크램블 에그 만드는 건 빠르지. 막 만든 요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조금 잘라 맛을 보니 기막힌 트러플 향이 계란에 촉촉히 베어 부드럽게 입안에 퍼져 나갔다. 트러플도 훈제연어도 자기주장이 강한 향이라 함께 먹었을 때 궁합이 괜찮을지 의아했는데 두번째 입에 달걀과 연어를 함께 넣는 순간 도대체 왜 궁금해한거냐, 정말 맛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첫 번째는 트러플을 입힌 계란만 한 입 먹어보고, 두 번째로는 훈제연어를 조금 잘라 함께 먹어보고 세 번째는 함께 나온 독일식 호밀빵에 샐러드와 계란, 연어를 한꺼번에 올려 먹어보자. 이렇게 간단하게 근사한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구나 싶을 것이다. 내게는 사실 유럽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유럽 음식이었고 이제껏 먹은 브런치 메뉴중에도 단연 베스트였다. 친구네 레스토랑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맛있어서 친구를 더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요리를 파는 곳의 주인이었다니. 상상이 안 간다면 꼭 집에서 한 번 만들어보길. 집에 트러플 오일과 훈제연어만 있다면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화사가 트러플 짜파게티 먹는 거 본 사람이면 집에 트러플 오일 하나씩은 있잖아.
엉덩이가 의자에 딱 붙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 비우고 나서야 일어나 천천히 RAW 컬처센터로 향했다.
날이 너무 좋다. 가는 길에 나오는 작은 공원들 하나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날씨다. 나오는 벤치마다 앉아서 해를 받고 싶어지는 그런 날씨. 슬슬 걸었는데도 15분도 안되어 컬쳐센터에 도착했다. RAW는 1967년 세워진 동베를린의 기차 수리소가 1999년 문을 닫고 버려진 건물이 되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그래피티를 겨루는 공간이었다가, 점차 서브컬쳐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는 수영장, 클라이밍 짐, 카페, 바, 클럽등이 들어와 있고 디자이너의 편집숍이나 가구 공방 등 베를린의 젊은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속속 생겨났다. 요즘에는 마약을 파는 사람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는 글을 읽고 약간 긴장하며 갔는데 웬걸,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굳게 내걸고 오직 클라이밍 센터만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아마 일요일에 문을 열고 월요일에 닫는 것인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여기저기 들어가보고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도 한 잔 하고 싶었는데. 거대한 벽이 정신없는 그래피티로 가득 채워진 게 진짜 베를린에 온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조금 설레었지만 주변은 그와 대조되게 너무 썰렁했다. 사진 한 장 찍어달랄 사람도 없어서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다시 20분을 슬렁슬렁 걸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도착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개성 강한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재탄생한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을 전시한 공간이다. 갤러리라고 하지만 장벽이 야외에 있기 때문에 그냥 장벽을 따라 걸으며 예술가들이 남긴 자유롭고 개성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면 된다. 장벽이 강가를 따라 늘어서 있어 걷다가 지칠 때 쯤 강가에서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작품(=장벽)이 끝나는 시점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왔다. 가는 길에 오렌지와 바질을 섞은 젤라또를 하나 샀다. 아니 누가 바질을 토마토도 아니고 오렌지랑 섞을 생각을 한거지. 상큼하고 향긋해서 이 날씨와 이 거리와 정말 딱이잖아. 독일은 젤라또 아이스크림이 정말 싸서 한스쿱에 1유로-1,5유로 정도 밖에 안한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베를리너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비싼 가격이라고 하지만, 한 스쿱에 4000원씩 하는 곳에서 온 나는 젤라또가 이렇게 싸면 정말 기쁘다.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지만 젤라또라면 또 말이 다른 거잖아요? 젤라또는 부드럽고 진하고 쫀득하고 아이스크림으로 예술을 한 거잖아요.
걷다가 강가에서 잠시 쉬었을 때 커다란 개 한마리와 함께 버스킹 하는 사내가 있었는데, 그가 The Rumineers의 Ho hey를 불러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 때 라임(요즘 많이 보이는 전동 퀵보드로 공공자전거처럼 빌려서 쓴다.)을 탄 한 무리의 한국 젊은이들이 내 근처에 멈추어 서서 함께 버스킹을 구경하기도 하고 강가에 앉아 멍때리기도 하고 한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패션을 하고 있었다는 것, 블랙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추어 입고 있었다는 것, 주변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몇 명이 정말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버스킹을 관람했기 때문에 그들을 찍던 카메라에 내가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한국에서 온 아이돌 그룹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누군가 이걸 읽고 있다면, 베를린처럼 보이는 강변에서 자신의 아이돌이 화보 촬영을 했다거나 한다면 제게 좀 알려주시라. 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키오스크에서 베를리너 킨들 맥주 한 병을 사서 오버바움 다리(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이어주던 다리)를 바라보며 절반 정도 마신 다음, 그 다리를 건너와 족히 스무명은 되는 무리가 마약을 파는 공원 하나를 지나쳐 거리 끝까지 더 걸었다. 할머니 두 분이 운영하신다는 빈티지 샵을 구경하는데 딱 맘에 드는 건 없고 적당히 괜찮은 것만 보인다. 이럴 때 사면 후회한다. 베를린의 좋은 점은 개성있는 빈티지샵이며 가죽공방들이 도시 곳곳에 많다는 것이다.
해가 질 때 쯤 집에 도착해서 카타리나와 함께 저녁을 차렸다. 나는 샐러드를 만들고 그녀는 푸실리를 삶았다. 그녀의 홀토마토와 나의 주키니 호박으로 만든 소스에, 그녀의 파르메잔 치즈를 파스타에 얹고 나의 모짜렐라 치즈를 샐러드에 얹어 오순도순 나누어 먹었다. 그들처럼 검소하고 공평한 저녁식사였다. 전 날 사둔 라들러 한 캔을 동량으로 나누어 마시며 함께 모바일 매거진에서 '힙스터가 베를린에서 해야할 12가지'같은 걸 찾아 읽으며 깔깔 거리고 웃었다. 이 중 누구도 힙스터는 없지만 베를린에서 힙스터가 해야할 일이라면 벌써 절반은 했다. 아니면 그런건 그냥 베를린에서 여행하는 일 자체로 쳐주는 걸지도 몰랐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베를린의 힙하고 정치적인 뮤직비디오 따위를 보다가 서로 정말 취향이 아니란 걸 깨닫고, 응 우린 절대 힙스터 타입은 못되네,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대신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