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출구, 착한 도파민 루틴 만들기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반. 마법이 풀리는 시간. 아침 8시 반에 삼킨 콘서타 한 알의 작용이 급하게 줄어드는 시간. 뇌 속의 도파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전두엽의 전원이 꺼진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지고,
문제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예민하고 에너지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점이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무엇보다 저녁에 일하는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시는 시어머니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이다.
ADHD를 가진 부모로서 일상을 지탱하는 건, 매일 아침 약 한 알에 의존해 '사회적 가면'을 쓰는 일이다. 약효가 도는 동안은 꽤 싹싹하고, 빠릿빠릿하며, 감정 조절도 잘하는 '정상인'의 범주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그 가면의 배터리는 무참히 방전된다.
특히 시어머니와의 대면은 엄청난 고사양 게임과 같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적절한 리액션을 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것. 이 모든 행위는 전두엽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소모한다.
리바운드 타임에 마주하는 시어머니의 일상적인 조언은 '간섭'으로, 무심한 눈빛은 '질책'으로 왜곡되어 다가온다. 반응 억제력이 떨어지니 표정 관리는 안 되고, 말투는 날카로워진다.
10시 반의 전략, 그리고 '아침의 연기'
결국 생존을 위해 전략을 수정했다. 가장 위험한 구간은 저녁 5시부터 9시까지의 4시간. 이 시간을 방어하기 위해 약 복용 시간을 아침 10시 반으로 늦추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저녁 8~9시까지는 '약효의 보호' 아래 머물 수 있다. 적어도 시어머니 앞에서 방전된 모습을 보이는 일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트레이드오프는 확실했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약 기운이 전혀 없는 '비약물 상태'로 시어머니를 마주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희생이 필요해. 희생 없이 키운 아이는 나중에 문제가 생겨"
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내 안의 깊은 두려움과 싸우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아침 1시간을 버텨낼 '연기력'을 기르는 것이다. 진한 커피 한 잔으로 각성 상태를 흉내 내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여 멍함을 감추고, 질문을 던져 듣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 이건 내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술'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과도한 계획'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계획표를 짤 때, 내 뇌는 이미 그 일을 다 끝낸 것 같은 '가짜 도파민'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못 지킨 계획은 부메랑이 되어 자책과 무기력으로 돌아왔다.
내가 계획에 집착했던 건, 어쩌면 통제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나라도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내 뇌가 도파민을 갈구하며 부리던 몸부림이었다는 걸 깨닫자, 비로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무리한 계획 대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돈도 안 드는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머릿속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고, 아이들과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 이 긴 호흡의 계획들은 뇌에 압박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성취감을 주는 '착한 도파민'이 되어줄 것이다.
ADHD 부모로 산다는 건, 매일 자신의 뇌와 협상하고 환경과 투쟁하는 과정이다. 리바운드 타임의 무력감도, 시어머니의 눈치도, 이상주의의 덫도 모두 내가 안고 가야 할 짐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단지 내 뇌의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신호일뿐이라는 걸.
오늘 저녁, 약 기운이 떨어져 몸이 축 처질 때, 나는 계획표를 접어두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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