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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Oct 06. 2022

후암동으로 오기까지

살고 싶은 곳에서 살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삶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작년 이맘때 쯤 후암동으로 이사왔다. 정릉을 거쳐 월곡동, 그리고 후암동으로 이사오기 까지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많은 집을 거쳐온만큼 사람들도 나를 많이 거쳐갔다. 결코 이별의 순간들이 아무렇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20대 초반엔 친구들과 이별했고, 중반엔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다.

그런 만남들이 지나가고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새로움은 해방촌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의 유럽여행 후 와인에 눈을 뜨고 서울에 돌아와 해방촌의 매력에 빠졌고, 해방촌의 바란 바는 다 찾아다녔다. 


해방촌의 술집들은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카테고리의 글들에서 많이 보여질 것이기에 우선은 이 곳을 추천한다. (프로 혼술러로써, 혼술하며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적고자 한다. 기대해도 좋다.)


'알덴트' , 금요일과 토요일만 오픈한다. 


주정강화 와인과 다양한 위스키를 저렴한 가격에 마셔볼 수 있는 곳인데, 평소 주정강화 와인을 즐겨 마신다면 여기가 제격일 것이다. 


그렇게 해방촌의 많은 술집을 돌아다니다보니 내 20대의 세번째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근방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 그리고 근처 소주부터 위스키까지 파는 사장님들과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그 손님들과 친구가 되어 사적으로도 만나고, 그 근처 술집에 혼술을 하러 가며 이전엔 만난적 없던 나이대와 직업, 성장과정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그 재미는 무척 컸다. 대학교를 나와 평범한 삶을 살던 나에게 다양한 사람들과의 다양한 대화주제는 내 속의 무언가를 쿡쿡 찔렀다. 나를 좀 더 넓은 사람으로 성장시켜주었던 것 같다. 내 또래들과의 대화와는 별 차이 없는 듯 하면서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헤어진 후에도 이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해방촌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 근처에서 살고 싶어졌다.


사실 원래 용산구는 나와 그렇게 동떨어진 동네가 아니었다. 외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용산구에 살고 계셔서 언제나 어렸을때 이 곳에 자주 오곤 했다. 그래서 더욱 친밀감이 느껴지는 이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이것도 하루라도 젊을 때 해야지 언제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25살이 되자마자 이사를 왔다.


이삿 날. 정리 중인 우리 집

월곡동에 살던 집처럼 작은 원룸이었다. 나는 적응을 잘하는 편이다. 이 집도 금방 적응했다. 

한 번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냥 이 곳이 편해진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테라스와 큰 창'이었다. 저 큰 창문을 열면 ㄱ자 큰 테라스가 나온다. 여섯명은 거뜬히 들어가는 공간이다. 나무를 주문해서 울타리도 세웠고 여름엔 그 곳에서 친구들과 고기를 구워먹었다.


이사를 온 2021년엔 뭐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어쩌지 분명히 마지막 기억은 인턴을 했던 기억인데.


아, 1학기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2학기엔 자주 제주로 떠났다. 가까워서 간과했던 제주가 나에게 이렇게 안정감을 주는 곳이 될 줄이야. 이젠 새로운 도피처가 생긴 샘이다. 그 땐 몰랐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가다보니 제주에 자주 갔다. 이모가 계셔서 숙박비와 식비가 어느 정도 굳는다는 엄청난 어드밴티지가 없었더라면 내가 그렇게 자주 갈 수 있었을까. 제주에 갈 때마다 일찍 일어나서 오름에 올라가고 건강한 밥을 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다보니 나 스스로가 많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자기소개서를 다듬으며, 자격증을 위해 공부하며 나도 모르게 많이 지쳐있던 나에게 제주는 커다란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제주에서 즐겼던 것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또한 이어지는 글에서 보여질 예정이다. 


평대리의 한 가게에 들러 얻어 먹은 한 접시. 원래는 양식집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이사를 오고 지금은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1학기는 복학을 했다. 25살이라는 어떻게 보면 학생치곤 적지 않은 나이에 비대면으로 거의 마지막이 될 학기를 다녔는데 다니면서는 자기소개서를 쓰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포트폴리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강박감도 어느정도 있다. 효율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도 챙기면서 저것도 잘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다보니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더 느꼈다. 




2021년에 업데이트한 내 포트폴리오. 앞으로도 정말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포트폴리오에는 나의 20대가 다 담겨있다. 

나는 보헤미안이면서 동시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20살엔 학교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살다보니 동네 친구가 없었다. 

어떤 재미로 살았었을까 떠올려보니 혼자 여기저기 아주 솔찬히도 돌아다녔더랬다. 

블로그도, 인스타그램도 그리고 연애도 열심히 온 힘을 다 해서 했다. 


대학교에서 친한 친구는 한 명 뿐이었다. 그 친구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하자면, 이상하게 처음부터 팀플의 같은 팀으로 우연히 자주 마주쳤었다.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칠까 하다보니 어느새 친해졌다. 친해지고보니 성격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했다. 그래서 편했다. 일과가 끝나면 나도 혼자 시간을 보내러 가기 바쁘고 그는 집도 멀고 운동을 즐겨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집에 가기 바빴다.



#난어떤사람이되고싶을까?


요즘 내가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내 많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이 이야기는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대학교


대학교에 들어오니 나보다 더 열정있는 사람들 천지였다. 와 저렇게 까지 한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다양하고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내가 발전하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복수전공에 동아리에 교환학생까지 도전했으나, 교환학생을 통해 첫 실패를 맛봤다. 나의 커리어에 있어 크나큰 위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나에게 있어 꽤나 큰 사건이었다. 교환학생 이야기는 곧 이어진다. 


불 같은 20살을 보내고 21살이 되자, 2학년부터 가입할 수 있다는 마케팅 동아리에 들어갔다.

과 동기들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선배들과 후배들과 교류를 하며 즐겁게 보냈다. 

마케팅 수업으로써는 느껴볼 수 없던 진짜 마케팅에 대해 느껴보고자 노력했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마케팅은 내 속의 무언가를 들끓게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마케팅을 더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스스로 많이 노력했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우선, 끊임없이 밖으로 나갔다.


갇혀만 있어서는 이 세상을 못 느끼기 때문이었다. 나가서 가게 간판들도 보고 요즘은 어디에 사람이 몰려있는지도 보았다.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인스타그램에서는 어떤 해시태그가 핫한지 그런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내 인스타그램에도 기록했다. 그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내가 하는 것들을 군말없이 따라와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친구였다. 



 #교환학생


22살엔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내 인생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던 시기였다. 


독일에 가기 2주 전엔 혼자 여행을 해보았다. 독일에 도착하여 캐리어 하나를 공항에 맡기고 나머지 하나를 질질 끌고 공항 근처 낡은 호텔에 갔다. 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생김새가 그랬다. 


가로등이 별로 없어 어두컴컴한 길을 200미터 가량 걸으며 22살의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 때가 지금보다 더 용감했던 서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호텔이라고 불렸지만 모텔같은 호텔에 도착하니 벨보이가 내 짐을 들어주었고, 나는 나의 방을 배정받았다.


방은 생각보다 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큰 침대에 혼자 누웠다. 눕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잘 터지지 않는 와이파이 때문에 유튜브 재생이 느렸다. 당연한 소리지만 텔레비전에는 알 수 없는 독일 방송들 뿐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태어나서 처음보는 벌레가 붙어있었다. 놀라서 호텔 로비에 가서 방을 바꿔주거나 퇴치 스프레이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둘 다 거절당했다. 다행히 문을 열어두니 알아서 나가더라. 



그리곤 바로 다음날,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바르셀로나는 생각보다 그저 그랬다. 어떻게 보면 명동같은 느낌. 그래도 첫 날밤 테라스에서 바라본 보랏빛 노을은 아직도 눈에 가득 담겨있다. 


바르셀로나 에어비앤비에서의 첫 날밤 바라본 노을


거기서 더 들어가서 지로나라는 소도시로 이동했는데, 기차를 이용했다. 스페인에서 아시아 여자애가 혼자 기차를 타고 가려고하니 다들 많이 도와주었었다. 한국의 어느 동보다 작은 크기의 도시여서 하루면 다 볼 수 있다는 지로나에 그렇게 도착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토사데마르라는 더 작은 도시까지 가버렸다. 


여행일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는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프랑스 남부 여행까지 마친 후 독일로 향했다. 드디어 학교 생활이 시작되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때부터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들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나에게 어느 정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믿음이라기보다는 자신감?


'나 이정도는 하겠지', '나라면 이정도는 해야지' 이런 자신감이었다.


이제껏 내가 해보고자 하는 일에 실패라는 결과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해냈다라는 기준이 나는 조금 낮은 사람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기준 열심히 한 만큼 항상 성공이라는 결과를 맛보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는데? 혼자 먼 타지에서 생활을 하려다보니 이 생각은 아주 큰 착각이었고 뒤늦은 깨달음은 내 뒤통수를 퍽! 하고 때렸다.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내 인생에서 첫 포기를 한 순간이자 처음으로 어떤 틀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그 어떤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해내야지, 이겨내야지, 할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이던 내가 나에게 준 첫 해방이었던 것이다. (그냥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가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글을 하나하나 적다보니 많은 것들을 이어서 할 수 있었다. 입이 아닌 손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니 차분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항상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내 머리속을 휘젓는데,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내가 어떤 걸 느꼈고 어떨 때 행복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글 쓰는게. 


또, 내가 경험하고 좋았던 모든 것들을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했다. 


내가 좋았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좋아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떻게 글을 써야 좋아요가 더 눌렸는지, 해시태그를 어떻게 달아야 좋을지 이런 고민들도 하면서 유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 마케터로 일을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였던 경험. 






다음 주제.




"별의 별일이 다 있었던 2022년"




예고




2022년은 참.. 26년 내 인생 가장 많은 일이 있었던 해가 아닐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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