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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생활방식, 노마드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아?

by 김글리

노마드 라이프


"지니! 오늘 내가 피망 엄청 땄어. 이따 받으러 와!"

배불뚝이 톰 아저씨가 내게 눈을 찡긋, 하며 유쾌하게 말했다.

"우와, 고마워요, 톰 아저씨!"


여긴 어디냐고? 호주 빅토리아 주에 있는 '카라반 캠핑장'이다. 돈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고 얼마전부터 여기에서 머물고 있다. 포도농장에서 일하는데, 진짜 열심히 한다. 일할 땐, 정말 물도 안 먹고, 말 한마디 안하고 악착같이 일만 한다. 능력제로 돈을 주기 땜에, 조금이라도 많이 따야하기 때문이다. ㅎ 일손 귀한 호주에선, 여행자들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간 중간 일하는게 흔하다. 자, 이쯤에서, 제 이웃들을 소개합니다~~

(*'카라반'은 이동식 차량을 개조해 숙소로 만든 것.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이동하기는 좀 불편했지만, 일반 여행자 숙소보다도 훨씬 싼데다 시설이 훌륭하다.)


아까 피망 받으러 오라는 톰 아저씨는 내 앞집에 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근로자로 인심좋고 아주 유쾌한 분이다. 쉰이 넘으셨지만 아직 혼자다. 오늘은 피망을 잔뜩 따가지고 왔다며 앞집, 뒷집 나눠주는 덕에 피망 잔치가 열렸다.


그 건너편에는 주름 자글자글하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사라 할머니가 산다. 할머니는 얼마 전 집을 팔고 캠핑카를 샀다. 그 차를 직접 운전해서 호주 전역을 여행하는 중이다.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데, 정말 놀랄 '노'자다.


옆집에는 호주 자매가 살고 있다. 두 자매 모두 배가 볼록 나왔는데. ㅎㅎ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둘은 19살, 20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는 대신, 지금 자동차로 호주를 여행하고 있다.

카라반 파크 : 이동식 주택인 카라반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카라반엔 먹고 자고 씻는 모든 설비가 완비돼 있고, '노마드'들이 거주하고 있다. flickr.com 출처

만약 이들이 한국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나이 70 먹어서 집 팔아 캠핑카를 샀다고? 노망난 거 아냐?' 그 할머니는 모르긴 몰라도, 괴짜라고 소문 좀 났을 것이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품팔아서 하루 벌어 하루 산다고? 쯧쯧. 안 됐구먼.' 그 아저씨는 아주머니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동정 좀 받았을 거다. '대학도 안가고, 여행을 다녀? 어떤 세상인줄 모르는구먼.' 그 자매는 덜 떨어진, 방황하는 젊은이쯤으로 눈치 좀 받았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여기선 다들 정상이었다.


여기선 누구 하나 제게 앞으로 뭐할거냐고 미래 계획을 묻지 않았다. 누구도 '왜 그렇게 사는 거야?' '언제쯤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살아갈거야?'라고 묻지 않았다. 그게 굉장히 신선했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내가 남들보다 뒤떨어진 건 아닐까, 내가 좀 이상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살지 않았다. 모두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생긴 대로 살아갔다.


이들이 가진 건 차와 약간의 짐뿐인 거 같은데 여유만큼은 세계 최고였다! 덕분에 캐러반 캠핑장에선 날마다 크고 작은 파티가 열렸다. 농장에서 포도 딴 날이면, 포도잔치가 열리고, 어제는 생일파티가, 오늘는 아무 이유 없이 바베큐 파티가 열리는 식이다.


바베큐 파티 중. 가운데 손 든 아저씨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다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여유롭기로 소문난 호주에서 받은 충격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이건 꽤 충격이었다. 솔직히 그렇잖아. ‘여유’는 남보다 괜찮은 연봉을 받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거고, '행복'은 명문대 나와서 일류기업 취직하면 생기는 건 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 나만 그런가? 한국에선 '어떻게 살아야 한다' 같은 표준FM이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면 남도 불안해하고 스스로도 불안해한다. 솔직히 나도 여행하면서도, '아,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렇게 멋대로 살아도 될까. 그러다 시쳇말로 루저 되는거 아닐까... 나도 남들처럼 살아야 하는거 아닐까.....' 마음 한 켠이 늘 불안불안 했다.


그런데 말이다, 캐러반에서 내가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꾸만 묻게되었다.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절대적인 삶이, 정상적 삶이란 게, 진짜 있기는 한 걸까?

그냥 내가 생겨먹은대로 사는 게 더 좋지 않아?


“우리의 문화는 우리 인간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우린 틀린 것을 가르치고 있다구. 그러니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애써 그것을 따르려고 하진 말게. 대신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하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나온 말이다. 교통질서와 같은 사회 규칙들은 지킬 수 있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가치가 내게 중요한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모리교수'가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면서, 제자인 '미치 앨봄'에게 그렇게 말한다.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라”

이 말은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나의 가장 큰 모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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