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방식? 그것부터 버려봐.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 걱정되지 않았느냐 두렵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웃기게도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이거였다.
당연히 세계여행자라면, 자기 키만한 배낭매고 떠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랬고. 그런데 예전에 호주 뉴질랜드를 일년간 돌아다녀보니, 굳이 배낭을 멜 이유는 없더라고. 일단 너무 무겁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 ㅠㅠ 나는 이번엔 그런 짐의 수직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품위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하면 배낭이지!' 란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세계여행인데... 출발 전날 밤까지 고심하다, 결국 결정했다. "좋아, 이번엔 캐리어다!!" 여행의 정석이 뭐든,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걍 내 맘대로 하기로 했다. 실은 그 맛에 여행하는거 아니냐고. 내가 맡은 모든 역할과 모든 틀에서 놓여나 한 마리의 자유로운 존재로 날아보기 위하야!!! '내 멋대로 하기' 를 여행의 유일한 룰로 삼았는데, 예상치 않은 태클이 걸렸다.
베이징을 갔더니, 뒷골목이 너무 재밌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적인 거리를 걷다가도 한모퉁이만 돌아가면, 허름한 옛날 건물이 즐비한 뒷골목이 훅~ 튀어 나온다. 어느 집 담벼락엔 빨래가 널려있고, 어느 집 대문 앞엔 인력거가 서있다. 양지바른 골목 한귀퉁이에 할아버지가 자리를 깔고 앉아 신문을 보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거길 쏘다니는게 너무 재밌어서 만리장성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한국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딜 다녀왔는지, 쭉 읊었다. 자금성도 다녀왔고, 천단도 다녀왔고, 또 어디갔지,?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거기 다 가보셨죠?" "어... 만리장성 안갔는데, 아직 자금성도 안 갔고요." 그러자 내게 한마디 했다.
여행 다녀보면, 해야할 리스트를 만들어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어딜 가면 이건 반드시 먹어줘야 하고, 여긴 꼭 방문해줘야 하고, 어디서 사진한방 남겨야 줘야 하고.. 이들은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유독 한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여행했다. 미리 5박 6일 코스로 빡빡히 짜인 스케줄를 짜온다. '이게 최선의 스케줄이야.' 그리고 도착하면서부터 그걸 소화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삐질삐질 돌아다닌다.
이들은 최선의 방식 the best way을 좇아 여행했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을 보면 좀 달랐다. 가만 보면 딱히 '해야할 리스트'가 없는 거 같았다. 내키면 종일 이라도 빈둥대며 책을 보다, 내키면 또 거리를 돌아다니고, 그러다 내키면 명소도 갔다.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으니까' 했다. 그날 숙소에 있는 외국 친구들에게 물었다. "야, 니네 중에 만리장성 가본 사람 손?" 하니, 6명 중 딱 1명 손들었다. 나머진 '거기 꼭 가야해?'라는 눈빛으로 날 보았다. ㅎㅎㅎ 갑자기 무척 반가웠다. 내 동지들이 여기 있었구만. 어떤 친구는 마추픽추가 있는 그 유명한 쿠스코도 맘에 안들어서 하루 머물고 바로 떠나버렸다고 했다. 에콰도르 가면, 한국인이라면 꼭, 반드시 찾게되는' 적도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서양친구에게 물어보니 적도박물관이 뭔지도 모르더라고. ㅎㅎ 이들은 최선의 방식은 몰라도, 자기만의 방식 my own way대로 여행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생긴대로 살고 싶었다. 과자 하나를 먹더라도, 내 방식대로 먹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올바른 방식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이게 맞을까? 어딘가 더 적절한 방식이 있지 않을까? 그날 한국인들을 만나고 나는 불편해졌다. 마치 내 방식이 올바른 게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올바른 방식에 대한 고민은 나만 했던게 아닌 모양이다.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젊었을 때 이야기다. 처음 그림을 그릴 때였다. 처칠은 길 옆에 이젤을 세우고, 가만히 서서 캔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캔버스 위에 콩알만한 점을 하나 찍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존 래버리경(*영국의 유명한 화가) 의 아내가 내렸다. 그녀가 처칠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윈스턴. 지금 뭐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요."
"그런데 왜 안 그리고 있는 거지요? 뭐가 문제에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소”
그러자 그녀는 처칠의 손에서 가장 커다란 붓을 빼앗아 들고서는 파란색 물감을 듬뿍 묻혀서 캔버스 위를 거침없이 마구 칠하기 시작했다.
처칠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위 이야기는 <사자같이 젊은 놈들> (구본형 저)에서 재인용했습니다)
올바른 방식이 어딘가에 있을 거란, 믿음은 언제나 날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올바른 방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불편했다. 내 방식이 틀렸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여행이란 나를 위한 시간 아닌가. 그러면 누구에게나 좋은 방식이 아니라, 내가 좋은 방식을 좇는게 좋지 않을까. 그게 내게 옳은 방식 아닐까? 어쩌면 캐리어를 끌고 나온 순간부터, 나는 '올바른 방식' 에 대한 낡은 믿음을 버리고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끝내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 베이징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