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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Oct 20. 2017

쓸모없음의 쓸모

빈 그릇의 쓰임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 도덕경


그릇은 속이 비어 있어 그 쓰임새가 명확하지 않다. 용도가 달리 정해진 것도 아니다. 물을 담으면 물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 반찬을 담으면 반찬그릇이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다목적'이다. 노자는 이를 두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말했다. “무용취시유용無用就是有用, 대무용취시대유작위大無用就是大有作爲” 즉 쓸모 없는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쓸모가 없을수록 더 큰 용도로 쓰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릇의 쓰임은 그의 '비움'에 있다 (이미지출처:www.meyo.co.kr)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우화가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나온다. 

"석(石)이라는 목수가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상수리나무를 보게 되었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고, 굵기는 백 아름, 높이는 산을 내려다 볼 정도였다. 가지 하나만 있어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지만 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지나쳐 버렸다. 

석의 제자가 그 나무를 지켜보다가 스승에게 훌륭한 목재를 그냥 지나쳐 버린 이유를 묻자, 석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건 쓸모 없는 나무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게 되고, 물건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게 된다. 이렇게 쓸모가 없었기에 그만큼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以爲舟則沈, 以爲棺廓則速腐, 以爲器則速毁, 以爲門戶則液만, 以爲柱則두. 是不材之木也. 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

상수리 나무가 자신을 보전하고, 사방의 생명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정한 쓰임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용의 유용함을 설파함으로써 '만물이 유용하다'는 뜻을 전한다. 


그런데 과연 '유용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산업화 시대는 인간에게 명확한 기능을 부여하고 교육하여,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발휘하도록 육성해왔다. 의사면 의사, 판사면 판사, 엔지니어면 엔지니어 등 명확한 기능- 쓸모를 가진 인간은 유용한 인간 곧 '인재'라 불렸고, 그만큼 대우를 받았다. '유용한 사람이 되라'는 대명제 하에 우리는 끊임없이 능력을 평가받고 비교당한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너는 무엇을 잘하는 인간인가? 각자 자신의 '명확한 쓸모'를 찾아 광야를 헤매었다. 

나는 어떤 기능을 가졌는가? 나의 기능은 명확한가? 이게 개인의 유용함을 가르는 지점이었다. 


각자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명확히 파악해야 행복하게 일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도그마가 널리 전파되어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특별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그 기능을 담아내기 위해 죽도록 노력한다. 우리는 채우고, 채우고 끝없이 채워간다. 유용한 물건이 되기 위해, 쓸모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하지만 정말 쓸모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정말로 쓸모가 있는 것들은 특정 기능을 가진 것보다, 비어있는 것들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밥을 담을 수 있고, 비어있기 때문에 방에 기거할 수 있으며,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쓸모를 채워넣을 수가 있다. 

빈 잔은 악기도 되고, 장식품도 되고, 술잔도 된다. (이미지출처:www.flickr.com)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휴대폰은 비어있다. 우리는 그곳에 각자의 필요에 따라 앱을 설치하고,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노트를 기록하고 자신에게 맞게끔 핸드폰을 활용한다. 폰은 '소통'을 위해 비어있는 도구의 다름이 아니다. 대나무도 속이 텅 비어 있다. 그 비어있는 공간이 소리를 만들기 때문에 대나무는 오래전부터 악기로 많이 쓰여왔다. 숫자 0도 마찬가지다. 


숫자의 발견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숫자 '0'은 무용의 유용으로 큰 가치를 평가받는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수치화되어 있는데, 숫자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0은 반드시 필요하다. 평생 0이라는 숫자에 사로잡혔던 세계적인 수학자 아미르 D 악젤은 <'0'을 찾아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 0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0이란 '아무것도 아니면서 엄청난 무언가를 대표하는 것, 무한이면서 동시에 비어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무용에 관해 이런 글을 썼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데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텅 비어있음 .... (이미지출처:www.sotaesan.co.kr)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다. 유학에서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는다는 걸 전제로 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쓸모가 있다. 따라서 쓸모없다는 말은, 쓰임새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더이상 그 쓸모를 찾지 못했다는 말일 뿐이다. 


남들 눈에는 쓰레기여도 어떤 이들의 눈에는 보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터치포굿이란 사회적기업에서는 버려지는 폐현수막을 모아 가방을 만든다. 노리단 이란 또 다른 사회적기업은 고철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한다. 이들은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쓰임새'를 찾아내었다. 


비어있는 것들은, 인간의 창조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 쓸모를, 새롭게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리단이 직접 만들고 연주하는 악기 (이미지출처: 노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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