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선을 넘어보기
나는 ‘야매’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야매는 ‘야미’라는 일본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정상적 또는 합법적이지 않은 경로나 방식으로 행해지는 일’을 가리킨다. 즉 뭔가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하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워 행하는 정신이, 곧 야매 정신이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런 정신에 흠뻑 적혀진 인간이라, 무엇을 하든 다른 방식은 없을까? 자주 묻는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본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고 싶으면 남들 다 가는 학원 대신 현지로 여행을 간다. 현지에서 생활하고 직접 부딪히며 현지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배우고 실제 써본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몸으로 경험하면서 배운 것들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덕분에 문법지식은 개뿔 없는데, 회화에 강하다.
고로 나는 정통보다는 야매로 뭔가에 통달한 인간들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 야매족들은 맞든 맞지 않든 기존의 방식은 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종족들이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남미에서 만난 '세스 Seth' 만큼 나의 질투심을 자극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좀 조심스러운데, 왜 그런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ㅎㅎㅎㅎ
세스를 만난 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행자 숙소에서였다. 당시 나는 세계여행 중이었고 경비를 아끼느라, 숙소에서 단기알바를 하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4시간동안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 대가로 더블룸에 공짜로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일한 덕분에 숙소의 현지인 스텝들과 전세계 여행자들을 두루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세스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곱상한 얼굴에 말끔한 차림으로, 겉으로는 별반 특이할 게 없는 20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눈에 들어왔던 건 그의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숙소에는 식사, 맥주를 마시며 어울릴 수 있는 큰 라운지가 있었는데, 여행자들은 틈만나면 그곳에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어울렸다. 희한하게도 세스가 있으면 그의 주변으로 자연스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왜 그런 친구들 있잖은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고, 어떤 주제로도 대화가 가능한 친구. 별로 하는 건 없는 것 같은데도 늘 대화의 중심이 되는 친구들. 세스는 누구와 있어도, 무슨 이야기를 해도 위화감 없이 편안해 보였는데,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아무런 경계가 없어 보였다. 그런 태도가 참 인상적이었다.
한번은 그와 저녁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레 각자 살아온 인생이야기며 여행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세스는 말끝마다 “내가 중국에서 살 때는…” “내가 스페인에서 있었을 때는…” “내가 태국에서 있었을 때는….” 라고 토를 달았다. 못 해도 최소 6년은 여행한 것처럼 보였다. '뭐야 26살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여행을 많이 했지? 대체 정체가 뭐야?' 궁금증이 폭발한 나는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세스는 조금 난처해하더니, 놀라지 말라며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무척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정작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지금 내가, 아니 대부분이 금기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뛰어 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고교 중퇴, 가짜 졸업장으로 대학입학, 약 판 돈으로 온갖 여행을 해온.. 어디 막장 삼류 인생으로 영화에 나올 법한 인물의 이야기인데.... 더 충격인건, 그런 인물이 아무 탈 없이, 별일 없이 너무 잘 살고 있다는 거였다. '야매인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온갖 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그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한두 시간 타. 그런 다음 텃밭에서 싱싱한 채소를 뽑아 큰 컵으로 건강주스 한잔 가득 만들어 쭈욱 들이키지.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종자 사업을 체크해. 저녁엔 친구와 운영하는 클럽을 들려서 일하지. 너 그거 알아? 불황에도 종자 사업은 꽤 잘돼."
그는 사업이 잘 돼서 여윳돈으로 아파트를 한 채 더 살까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거창한 계획이나 꿈 없이도 재밌게 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세스 때문에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세상이 그어놓은 금을 밟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고 단속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느라 제대로 미쳐보지도 못 했는데… 제기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모든 걸 해버릴 수 있는 거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가짜 졸업장, 약 판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잠시 접어 두고,
세상이 규정해놓은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비껴간 그의 대범함. 거기에 한없이 질투가 일었다.
세스를 보며, 베로니카가 떠올랐다.
베로니카는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베로니카는 아리땁고 젊지만, 무미건조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자살은 미수에 끝나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고 마는데....의사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일주일뿐이라고 말해준다. 처음엔 자신이 곧 다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지만,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고 앞두고 살아가게 되자 많은 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으며, 처음으로 자기에게 무례해졌다. 다른 이들에게 'NO'라고 말했고, 화를 내었다. ~척, ~체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삶이 너무 짧았으므로. 무엇보다 죽음 앞에선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얽매여온 온갖 틀을 벗어버리는 베로니카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나는 대체 뭐가 두려워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거지?
뭐가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거야? 어차피 한번은 죽을 텐데…’
위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뭔가를 선택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뭔가를 바꾸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체념했다
지금까지 무엇 하느라 내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거지?
"나는 좀 더 미친 짓을 했어야만 했어.”
세스와 베로니카. 이 두 인물이 밤새 날 뒤흔들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죽, 나를 사로잡은 이들은 바로, 바로 '선을 넘나드는 이들'이었다. 기존의 질서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버리는 혹은 깨트려버리는 이들은 내 카타르시스의 원초였다. 셜록 홈즈와 머릿싸움을 벌이던 프랑스의 '괴도 루팡',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대동강물까지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장원급제에도 방랑의 길을 택해 전국을 떠돌며 글로 사람들을 울고 웃기던 '김삿갓' ... 사람들은 비도덕적이라고 욕했지만, 난 그들이 좋았다. 기존의 틀을 가비얍게 넘나들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통념을 와삭, 깨트려버린다는 점에서 사랑스러웠다.
좀더 커가며 거기에 서태지가 추가됐고 한비야, 류시화, 구본형, 김어준도 가세했다. 기존의 틀이 수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고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으로, 여행으로, 글로, 다양한 프로젝트로 스스로를 표현했다. 언제나 나는 정해진 선, 틀 밖의 세상이 궁금했고, 그 틀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끌렸다. 그들을 보며 나도 그렇게 남들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남들의 시선을 위해 살기엔 인생이 짧으니까. 그럼에도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쉽잖았다.
세스를 만난 이후, 그동안 눈치 보느라 뻔뻔하지 못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억눌러왔던 내 안의 야성을 풀어헤쳐놓고 싶어졌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모든 미래계획이 사라지며, 일상 자체가 없어진다면, 오늘 하루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미국의 어떤 할배가 이런 말을 했다. “긴 시간을 두고 살지 말고, 순간만을 맞으며 살아가라.”고. 나는 이 말이 나의 두려움을 하나씩 깨트려가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내 인생의 금기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착한 척, 괜찮은 척 하느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 살아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싸가지 없이 대꾸하기
사람들 앞에서 섹시댄스 추기
대놓고 욕하기
대놓고 욕먹기
썩소 날리며 크게 비웃어주기
나이트클럽 가서 미친 듯 놀아보기
‘마음에 안 든다’고 솔직히 말하기
세계일주하기
앞에 쌓인 과자 먹지 않기
배고픔을 참고 1분 더 기다려줘 보기
밉다, 짜증난다, 싫다고 말하기
‘난 다르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힘들다고, 외롭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기
‘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
남 기대 저버리기
돈 걱정 안하고 마음에 드는 것 사기
출근길에 1시간 일찍 집을 나와 딴 길로 빠져 여행하기
가슴 푹 파인 드레스 입고 프로필 촬영하기
지금 막, 갑자기 떠오른 곳으로 무작정 야반도주하기
유혹해보기
죄책감 없이 빈둥대기
미니스커트 입기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요구하기
시간, 돈 낭비하기
기분 상했다고 솔직히 말하기
망가지기
아무것도 없지만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아무것도 없지만 나를 믿고 가기
과감히 속마음 들키기
극작가였던 조지 버나드쇼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다시 산다면, 될수도 있었으나 한번도 되어보지 못한 사람으로 살고싶다.”
때론 내가 살지 않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를 위해 가끔 벼락 같은 기회를 내게 선물하고 싶다,
내 안의 야성이 기지개 좀 켤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