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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을 소개합니다

자신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좋은 방법, 이름

by 김글리

제발 이름 좀 바꿔주세요!


어릴 때 내 이름은 촌스러웠다. 내 본명은 김글리가 아닌, 김귀자.

초등학교 다닐 당시, '가람, 슬기, 나래, 온누리' 와 같은 예쁜 한글이름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 와중에 내 이름은 눈에 띄게 예스럽고 촌스러웠다. 학교에선 귀남이, 귀돌이로 놀림 받았고 심지어 발음도 쉽지 않아 ‘김기자, 김구자, 김구이자’ 별별 희한하게들 불렀다. 나도 친구들처럼 예쁘고, 부르기 쉽고, 정감가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러던 중 내게도 기회가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나라에서 이름으로 놀림 받는 사람을 구제해주기 위해, 특별히 공짜로 이름을 바꿔준다고 했다. (이름 바꾸는데도 돈 드는 줄은 몰랐다) 가족들도 모두 찬성했고, 내게 어울리는 새 이름을 짓기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냈다.


“지원이 어때?”

“김 흰은 어때? 아냐아냐, 니 덩치를보면, 김산이 더 좋을거 같기도 하고”

“김명선은 어때? 원래 엄마가 그걸로 지으려고 했다잖아.”

“에이, 그건 너무 촌스럽지. 그리고 쟤랑 이미지가 안 맞잖아.”


별 마땅찮은 이름들이 거론됐지만, 그게 뭐든 김귀자보단 나을 터였다. 가족들과 이틀동안 고심하며 상의한 끝에 ‘김지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름변경을 신청하려는데.....그 순간, 이름을 바꾸면 안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냥 김귀자로 살아도 되겠다, 김귀자로 살아보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저, 그냥 김귀자로 살게요."


그리하여 나는 다시 '김귀자'가 되었다. 덕분에 '귀남이'란 놀림을 몇 년 동안 더 들었고, 내 이름을 잘 못알아듣는 사람들 덕에 여러번 이름을 말해줘야하는 수고로움도 여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게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누가뭐래도,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였는지, 심지어 귀자라는 이름이 남들과 달라서 오히려 귀해 보였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귀한자식'이라고 알리기 시작했다. 어디 가서 인사할 때면, "안녕하세요, 귀한자식 김귀자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재밌어 했다.



이름의 재발견, 나의 재발견


이름을 스스로 다시 선택한 그 시점부터 무한한 애정이 샘솟아났다. 사랑하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하나씩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주게 됐다. 그러면서 나만의 이름 철학을 만들어갔다.

귀쟈=귀한자식 ㅋㅎㅎㅎ

철학1. (모양편) 자유분방한 생명력과 수용력을 담다

나는 이름과 그 사람의 캐릭터가 서로 닮아 간다고 믿는다.

내 이름을 보자면, 일단 받침이 없다. 나는 이름을 쓸 때, 길게 쭉쭉 빼서 쓰고, 모양 또한 자유분방하다. 또 '귀자' 글자 모양을 한번 봐 보자. 그 안에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가 하는게 느껴지나? 그러한 자유분방함, 받침에 얽매임 없이 어디로든 자유로이 뻗어 나갈 수 있는 생명력, 모든 것이 휘감아져 들어오고 나가는 물 같은 수용력. 이러한 '흐름' 을 이름에서 발견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귀자에서!


귀자: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힘을 담다


철학2. (의미편) 귀한자식

귀자를 풀면 말그래도 '귀한자식'이 된다. 여기서 나의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귀한자식의 의미가 ‘나를 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다 내 이름에 신이 부여한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챘다. '나 자신을 귀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남을 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라는.


귀한자식: 스스로를 귀하게 만들고, 나아가 남들도 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


철학3. (세계편) KJ, 국제

심지어 국제성마저 발견했다. 귀자의 영문 이니셜은 'KJ'다. 어느 날, 마을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국제 이삿짐 센터' 차량을 보게 됐다. 그런데 국제 이삿짐 센터의 영문표기가 바로 'KJ' 가 아닌가! 순간 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귀자’가 ‘국제’와 통한다는 걸, 이삿짐 센터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ㅋㅋㅋ 그러니까 내 이름엔 내가 앞으로 ‘국제로 뻗어나갈’ 운명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던 거다! 이건 날더러 세계인이 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말인다. 그 덕분인지 정말로 세계 여기저기로 신나게 쏘다니게 된다.


KJ: 나는 국제적 운명을 타고난,
글로벌 시티즌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글로벌시티즌'이라고 칭한다. 외형만 봐도 그렇다. 무쌍에 노르스름한 내 얼굴은 어딜봐도 동양인데, 키 175cm에 북유럽의 체형을 간직한 내 몸은 서양에 가깝다. 무엇보다 내 정신은 동서양이 뒤섞인 그 중간쯤 어디이다. ㅎㅎㅎ

내가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다 ㅎㅎㅎㅎ

의미부여의 힘


여기까지가 내가 발견해낸 철학들이다. 앞으로도 철학의 가지는 무수히 뻗어나갈테고, 결국 내가 살아갈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다. 흐흐.


중요한 건, 이거다.

이름에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제 '내가 붙인 의미'로 내 이름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름이 촌스럽네요, 발음이 쉽진 않아요' 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어머, 귀한자식? 진짜 좋은 이름이네요." "정말 독특한 이름이에요. 정말 귀하게 크셨나 봅니다." 라고.


그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내 이름을 봐왔는데, 스스로 이름을 선택하는 순간 나는 나의 시선을 회복했다. 게다가 의미를 부여하게 되자, 이름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사람들도 내가 부여한 의미에 따라 내 이름을 보고 경험한다. 이때부터였다, 이름이 가지는 힘에 주목하게 된 건.


그리고 이름으로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발견한 게 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건 내 시선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내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곧 내 삶을 책임지는 주도성을 회복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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