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너의 것을 찾아가는거야

by 김글리

살다보면,

누군가가 지나간 말로 슬쩍 던진 게 내 직업이 되고, 내 모토가 되고, 내 삶을 바꾸게 되는,

그런 경험이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해"라는 내 모토가 된 말도 그랬다.

그 말을 해준 건 터키계 호주인이었던 '써지Serge'였다.


그를 만난 건, 2004년 호주에서였다. 당시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넉달동안 세 개의 알바를 뛰어 모은 돈으로 호주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겉으로는 호주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좀 보고, 영어 공부도 한다 였지만 본심은 따로 있었다. 바로 호주원주민을 만나는 것!

호주원주민.jpg 호주원주민 사진: 출처미상

당시 <무탄트 메시지>(말로 모간 저, 류시화 역) 책을 읽고, '호주원주민'에 대해 커다란 환상을 품고 있었다.

책의 주인공인 '참사람부족' 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 부족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연에서 구했다. 먹을 것은 물론, 옷, 놀거리, 치료약도 모두 자연에서 왔다. 이들에겐 각자가 지닌 재능을 바탕으로 이름을 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다들 이름이 '큰 짐승의 친구, 바느질하는 여인, 노래하는 자, 치료사, 위대한 음악가'와 같은 식이었다. 그들은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다. 대신 전보다 나아지는 것을 축하했다. '음악가'라는 이름을 지닌 한 남자가 어느날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오래전에 생각한건데 말야, 나는 이제 음악가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바꿔야 할거 같아.”

코미디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스스럼없이 표현했고, 자연스럽게 꽃피웠다. 나는 지구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종족이 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호주원주민들의 문화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들이라면 우리가 잊어버린 삶의 본질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세상의 중심, 앨리스프링스에 오다

앨리스스프링스_Holly Wang _flickr.jpg 원주민 자치구인 '노던 테리토리'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앨리스스프링스 © Kelth 출처: www.flickr.com

호주를 반바퀴 돌아,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앨리스스프링스'에 왔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호주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아주 거대한 붉은 돌 ('울룰루' 또는 '에어즈락'이라고 불린다)이 있다. 그걸 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곳에 오면 왠지 호주원주민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원주민을 만날 수 있을까?' 앨리스 스프링으로 오는 내내 흥분했다.

uluru.jpg 호주원주민들이 신성시했던 울룰루. 지금은 관광지로 전락하고, 원주민들은 더이상 그를 찾지 않는다.

도착해보니 세상 중심인 건 모르겠고, 사막의 중심인건 확실했다. 날이 무지하게 더웠다. 15분 마다 물을 먹지 않으면 탈수로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서 나는 도마뱀 박물관을 간다고 한 시간째 헤매는 중이었다. 그 까짓 도마뱀이 뭐라고, 이 고생이야! 씩씩대는데, 전방 10미터 앞에 나를 구원해줄 한 남자를 발견했다.

대번 그리로 달려갔다.

"저기요,'도마뱀박물관'가려는데, 아시면 길 좀 가르쳐주세요."

-오, 여행하는 중인가요?

"네, 호주 한바퀴 돌 참이에요."

-그런데 호주는 왜 온 거에요?

"호주원주민들 문화에 관심이 많거든요.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요."


그 남자는 가까이서보니, 뭔가말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이 있었다. 지중해처럼 투명하게 푸른 눈동자에 홍채는 에메랄드빛이었다. 거기에 은발 섞인 검은 머리를 길게 땋았는데, 엉덩이까지 늘어졌다. 뭔가 자유로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났다. 동양의 은자에 히피를 섞은 느낌이랄까? 내가 그를 관찰하는 동안 그도 나를 관찰하고 있는게 느껴졌다. 어디서 이런 종자가 왔나 싶었을테다. 아무큰 나를 흥미롭게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실은 나도 호주원주민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좀 알기도 하고요. 마침 오늘 일 쉬는데, 내가 가이드 좀 해줄까요? 가고 싶은데 있으면 어디든 데려다 줄게요.


정말? 이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막았다. 당장이라도 오케이! 하고 싶었지만, 너무 과한 친절은 뒤끝이 안 좋은 법이다. 그래서 그를 다시 찬찬히 뜯어보는데 파란 눈이 걸렸다. 흠... 저렇게 맑은 눈이라면, 날 잡아먹진 않겠지. 한번 믿어보자.

"오케이, 좋아요." 내가 승낙했다. 그러자 그가 싱긋 하며, 말했다.

- 내가 어느 관광객도 절대 볼 수 없는 호주 사막의 모습을 보여줄게요. 사막 곳곳에 숨겨진 원주민의 흔적을요.

16295376280_bf61a3e62d_z.jpg 사막투어길

써지와 함께 한 사막투어


그는 알고보니 내 나이의 딱 두배였다. 하지만 우린 바로 친구 먹었다. 너무 잘 통했거든. 써지와 나는 무척 잘 통했다. 당시 내 영어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생존만 가능한 정도였다. 그런데 현대생활과 문명 비판부터 시작해서 호주원주민의 생활상까지 아주 심오하고 심오한 이야기들을 가득 나누었다. 내 짧은 영어로도 그게 가능하더라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날 내내 써지의 차를 타고 호주 사막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러 가지 사막식물을 보았다. 사막식물은 평소엔 땅에 숨어있다가, 비만 오면 순식간에 피어나서 씨를 뿌리곤 다시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한다. 신기했다. 어디에나 자기만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구나. 사막 새도 봤다. 꼭 뚱뚱한 까마귀처럼 생겼는데, 꼬리털이 빨갛다. 안타깝게도 사진 한장을 못찍었다...ㅡ.ㅡ 써지는 내가 혼자 왔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호주의 사막 구석 구석을 보여주었다. 사막공원, 옛 통신국, 호주원주민들이 살았던 동굴, .... 거대한 애벌레 처럼 생긴 캐터필러라는 바위에 새겨진 원주민의 표식도 보았다. 이에 관해 여러 설명을 해줬는데, 다 알아듣지 못했다.


emily_gap_alice_springs.jpg 호주 원주민이 신성시 하는 곳인 '에밀리 갭' 엤는 호주 원주민의 오래된 그림: 이 돌에 새겨진 캐터필러(애벌레)는 호주원주민에게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i


써지는 굉장히 박학 다식해서 역사, 철학, 문화,인류학, 어떤 주제로든 얘기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을 '개고기의 나라,88올림픽, 6.25전쟁'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한국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무엇보다 써지는 호주원주민 문화에 대해 잘 알고있었는데, 어느 부족 양자로 들어가 같이 살기도 했단다. 뭐시라? 호주 원주민의 양자?? 내 동공이 확대됐다. 그럼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


물론 확인은 불가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진실함과 호주원주민에 대한 박학다식함으로 미루어 거짓말 같진 않았다. 써지는 원주민들의 역사, 여러 풍습에 관해 얘기해주었다. 그들의 결혼방식이 독특했는데, 당사자는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고 부족간의 약속에 의해서 맺어진다고 했다. 듣고 보니, 우리나라 중매 같았다. 그도 원주민의 여자와 혼인한 상태라고 했다. 궁금해졌다. ‘만약 상대가 못생겼거나,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이들도 이혼 같은 걸 하려나?’ 참지 못하고 써지에게 물어봤는데, 그 대답이 놀랍다.


"그런 건 상관없어. 우린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없거든.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 우린 사람들한테 '아름다운 여인', '잘생긴 남자'라고 말하지 않아. 그저 다를 뿐이거든."



기준은 절대적인 게 아냐


그저 다를 뿐이라... 호주 와서 'Just Different' 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호주는 역사는 짧지만, 개방적 이민 정책으로 세계각국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호주문화는 원래의 원주민 문화에 유럽, 아시아 문화까지 다양한 문화가 한데 섞여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것도 틀리지 않고 ‘그저 다를 뿐’이란 말을 많이 한다. 조금만 달라도 쉽게 '틀렸다'고 말하는 문화에서 자란 나는 이런 개방성이 놀랍고 부러웠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써지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우린 아름다움이란 허리 몇인치, 얼굴은 계란형, 키 168cm에 몸무게 45kg. 이런식으로 정형화된 사회에 살고 있잖아. 그런데 '아름다움이 없다'니...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 기준이란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실, 살다 보면 이 사람은 이 말 하고, 저 사람은 저 말하고, 내 생각은 또 다르고 기준이란 게 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 생각대로만 살고 싶지만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는 거 같아서 두렵고. 남의 말 듣자니 헷갈리고.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지..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 게 있기는 한 걸까?


써지는 터키출신으로 고위공무원으로 일하다, 꽤 오래전 호주로이민왔다고 햇다. 지금은 중국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한다. 그는 더 나은 '뭔가'를 발견하고 이곳에 왔다고 했는데, 그게 뭘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애니, 널 보면 내 젊을 때 모습이 보여. 네 영혼은 길들여지지 않았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달라보여. 아마 나와 비슷한 길을 걷지 않을까 싶어. ㅎㅎ"


아, 그래서 우리가 잘 통했나?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해


이틀 동안, 써지와 사막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동화 속에 있는 거 같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와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를 통해 호주 원주민에 대한 나의 갈증을 씻어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원주민들의 구역인 노던테리토리의 주도인 '다윈'으로 기차 타고 갈 참이었다. 기차역까지 써지가 배웅해줬다. 헤어지면서, 내 뒤통수에 대고 써지가 소리쳤다.


“널 보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해.”

앨리스스프링스 기차역_Kelth_flickr.jpg 앨리스스프링스 기차역© Holly Wang 출처:www. flickr.com

철커덩, 기차가 출발했다. 써지가 챙겨준 군것질 거리를 먹으며 나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기차를 타고 가며 생각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관점에 반했었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그들의 문화에 감탄했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원주민을 만나는 자체 보다 그들의 다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내가 믿어온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보고 싶었던 거 같다. 그러니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다고, 그걸 내 자신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거다.


자유로운 영혼을유지해... 그 말이 만트라처럼 지금도 내 머리를 맴돈다. 써지와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구도 네 삶을 좌지우지 하도록 놔두지 마.

누구도 네 꿈을 좌절시키게 내버려 두지마.

누구도 네게 ’넌 할 수 없어‘라고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마

넌 그걸 스스로 지켜내는거야. 자유로운 영혼, 그게 너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국경 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