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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Nov 13. 2019

호주 1년,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외국에서 1년 살아보기

언젠가 한번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힘으로. 그리고 21살, 마침내 호주에서 그 기회를 맞게 되었다. 


호주를 가게 된건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대학교 3학년때, 말로 모건이 쓴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통해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며 개인이 가진 재능을 존중해주는 호주원주민의 문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반한 나머지 이들을 꼭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그러던 차, 마침 학교에서 호주 시드니대학 교환학생을 뽑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운명이다! 두 달 간 영어공부를 하면서 빡세게 준비했지만… 역시 공부는 너무 지루했다. 


그러다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행, 공부, 일 모두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아주 기특한 녀석이었다. 워킹홀리데이로 급선회하고서 본격적으로 외국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는 내가 호주라니! 혼자 1년을 보내야 한다는게 두렵기보다 가슴 설레도록 기대가 되었다.

 

준비할 건 끔찍하게 많았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건 돈이었다.  비행기표며 주거비, 어학연수비 등 초기정착에 드는 비용을 계산해보니 약 400만원정도가 필요했다. 나는 그를 석달 동안 모으는 걸 목표로 하고, 3~4개 아르바이트를 하며 눈물겹게 한 푼 두 푼 모아갔다. 마침내 400만원을 모아 호주로 떠났다. 나는 1년을 쪼개, ‘3개월은 공부하고, 3개월은 일해서 돈 모으고, 나머지는 모조리 여행’이란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해외라, 스트레스가 엄청났지만 스스로를 달랬다.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 뿐이야, 두려워하지마.”



내 생애 첫 번째 해외생활


내가 처음 정착했던 곳은 호주 동부에 있는 조용한 도시 브리즈번이었다. 이곳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 도시 곳곳에 여유가 흘러 넘쳤다. 어딜 가나 공원이 있고, 그곳에서 일광욕하고 책 읽으며 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점은 저녁 6시면 닫았고, 주말이면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런 여유로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브리즈번의 흔한 공원 풍경 (이미지 출처: martin uebel)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혼자 힘으로 살아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신문과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살 집을 구하고, 영어를 배울 어학원을 직접 돌아다니며 고르느라 2주가 금세 흘렀다. 이곳은 많은 게 우리와 정 반대였다. 일단 계절이 반대고, 스위치 켜고 끄는 방향도 반대, 화장실 물 내려가는 방향도 반대, 차선도 반대다. 그냥 모든 게 신기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을 사귀며 호주 생활에 적응해갔는데… 적응할만하니 돈이 없다. 가져간 돈은 3개월도 안돼 바닥났다. 


모든 걸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가만 보니 다른 친구들은 돈이 떨어지면, 레스토랑 서빙, 빌딩 청소 등을 하며 주로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호주 하면 아웃백(오지) 아닌가! 나는 호주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싶어서 오지로 가기로 했다. 마침 남쪽 빅토리아 주에 포도 수확철이 다가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때는 12월, 호주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되다


호주는 사람이 귀하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지만, 인구는 약 2천300만 명밖에 안 된다. 몽골, 그린란드를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낮다. 그래서 좋은 건 인건비가 비싸다는 점. 한 두달 바짝 일하면 경비모으기가 어렵잖았다. 두 달 바나나 따서 천 만원을 번 여행자도 있다는 풍문도 들었다. 희망이 생긴다. 나처럼 농장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꽤 있어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6명이 모였다. 우리는 자동차를 렌트해 빅토리아주의 밀두라(Mildura)라는 소도시로 들어갔다. 시드니에서 밀두라까지 지도상으론 5cm에 불과했는데, 막상 차를 타고 가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호주가 남한의 77배라고 하더니, 빈 말이 아니었다.

길 가는 이런 황무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미지출처:www.flcikr.com)


미국영화처럼 끝없이 펼쳐진 사막 도로를 따라, 하루를 달려 밀두라에 도착했다. 밀두라는 인구 3만인 아주 작은 도시지만, 포도주산지로 유명하다. 덕분에 농장들이 많아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해 많은 여행자들이 돈을 벌러 이곳을 찾았다. 그래서 이곳의 많은 숙소들은 여행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역할도 겸하는데, 이들 숙소를 워커백팩(Worker backpack)이라 불렀다. 


내가 들어간 워커백팩에는 30~40명은 족히 되는 세계각국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대개는 배낭여행을 하다가 돈이 떨어져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하지만 때를 잘못 맞춘 듯싶다. 올해 날씨가 변덕스러워 작황이 좋지 않단다. 쉐트! 당연히 일자리도 없단 얘기다.


돈 벌러 왔는데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으니, 돈만 까먹는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앞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6개월 할 계획이었는데, 경비를 마련하려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숙소매니저인 래리(Larry)를 공략하기로 했다. 래리는 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몸이 인상적인 30대 호주남자였다. 착해서 시덥잖은 농담을 해도 잘 받아주었다. 그는 숙소 관리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는 역할도 함께 했다. 나는 매일 같이 래리를 찾아가 친분을 쌓았다. 래리를 통해 오늘은 어떤 일이 들어왔는지 체크하고, 일이 없는 날에는 숙소를 청소해서 방값을 깎았다. 친분을 쌓은 덕에 그 뒤로 일자리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은 날마다 바뀌었다. 피망따기, 호박따기, 포도따기, 마늘 뽑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조금씩 이력을 쌓아갔다.

다국적 친구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김글리

일단 한번 믿어봐


시간이 지나니 이곳 생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일하는 패턴을 보면 한국인/외국인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시간제로 할 때는 다들 똑같은 속도로 천천히 하는데, 능력제로 하면 한국인들은 완전히 태도가 돌변한다. 말도 안하고, 밥도 안먹고 미친 듯이 일한다. 제일 열심히 하고, 돈도 제일 많이들 벌어간다. (*‘시간제‘는 시간당 돈을 지급하고, ‘능력제‘는 한 만큼 주는 급여시스템이다.) 한국인들 때문에 일거리가 없다고 현지인들의 푸념할 정도다. 나도 그런 한국인 중 하나였다.


일자리 배정에도 순서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수익이 나는 좋은 일자리는 모두 기존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고, 신참인 나에겐 하루짜리 일만 돌아왔다. 지속적인 일자리를 구하려면, 농장주나 매니저와 연결되는 ‘줄’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다, 이전 농장에서 알게 된 베트남계 매니저 티라(T.ra)가 생각났다. 당장 그에게 전화했다. 


“티라, 나 애닌데 (당시 내 영어이름이‘애니’였다), 너 요새 일거리 좀 있니?” 

“아, 애니! 음… 요즘 일이 많지 않긴 한데. 기다려봐.” 

“야, 솔직히 우리처럼 일 잘하는 사람도 없잖아.” (안 줄까봐, 배짱 튕겨본다)

“좋아! 내일 포도 따는 일이 있어. 2명 더 데리고 와도 돼.” 

“오, 감사감사!.” 

“뭘. 내일 아침 6시에 픽업 갈 테니, 숙소 앞에 나와있어.” 

“오케이!” 


농장과 노동자 사이를 인력알선업체처럼 연결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컨트렉터(contractor, 중개업자)라 한다. 이쪽 지방에선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꽉 잡고 있었다. 티라도 컨트렉터 중 하나였다. 늘 남들이 구해주는 것만 했는데, 직접 연락해 보니 오, 된다. 내 일자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기 시작했다. 굉장히 뿌듯해졌다. 그래, 이렇게 부딪히면 되는구나. Trust myself, 그냥 나를 믿으면 되는구나. 


그 뒤 티라와 손잡고 몇 번 일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구해보기로 했다. 중간에 티라가 일 소개비로 수수료 떼는 게 아까웠고, 가만 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먼저 지역신문을 구해 인력정보란을 뒤졌다. 농장주들이 주로 지역신문에 일손 구하는 광고를 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 조건이 좋아보이는 몇 몇 농장을 골라, 전화를 했다. 안 되는 영어로, 일단 ‘내가 얼마나 일 잘하는지 보고 결정하라’고 큰소리부터 쳤다. 희한한 게 상황이 급해지면, 없던 배짱도 마구 생겨난다. 뭐, 안되면 말고. 그러다 한 포도 농장주와 연결이 되었다.



성장의 증거


개리(Garry) 아저씨는 걸걸한 쇳소리로 “노 워리즈(문제없어)” 을 하루에도 열 번 이상 외치는, 40대 농장주였다. 온갖 종류의 포도를 기르고 있어서 일거리가 많았다. 나는 한동안 그와 함께 일했다. 능력제로 일을 했는데, 포도를 딴만큼 돈을 주기 때문에 일할 땐 시간이 아까워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얘기 한마디 하지 않고 독하게 일했다. 짧고 굵게 돈을 모아야 가능한 한 오래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근성에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사람들이 날더러 “너는 능력제 인간이 되긴 힘들겠다”고 말해 왔었다. (*능력제 인간은 끈기 있고 독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천성이 유유자적한데다 평소 말도 행동도 도무지 급한 것 없이 느릿느릿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걸~ 생각보다 나는 훨씬 독했고, 훨씬 영리했고, 훨씬 더 잘해가고 있었다. 대체 이런 면들이 다 어디에 숨어있어나 싶을 정도로, 나의 생존 능력은 경이적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사막 한 가운데 던져놔도, 알로에 재배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았다. 

이런 포도농장에서 일했다

나중엔 일 잘한다고 농장주가 아예 자기집에 오라고 해서 농장주 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일했다. 밥도 제공해준 덕분에 편하게 지낸데다, 돈도 더 절약할 수 있었다. 농장일 하면서 지낸 지 어언 2달이 흘렀다. 다행히 처음 목표했던 돈이 얼추 모아져서,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어벙하게 비행기 내릴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호주생활이 5개월이 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전에는 크게만 보이던 게 점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호주 농장주들과 협상하고 함께 일하는 걸 상상이나 해봤나!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을, 오늘 하고 있다. 그게 기쁘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길거리 연주자로 데뷔하다


그 뒤 사막을 비롯해 몇 달간 호주를 한 바퀴 돌며 여행했다. 어느덧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떠나온 길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더불어 가진 돈도 달랑거렸다. 앞으로 뉴질랜드, 태국, 말레이시아에서의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었다.


당시 ‘팬플룻’이란 대나무로 만든 악기를 가지고 다녔는데, 소리가 맑고 청아해 불고 있으면 주위로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몰려들었다. 그 덕에 외국인들과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는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사정 때문에 자나깨나 돈걱정을 하는 나를 보고, 한 일본인 친구가 이런 조언을 해줬다. “아까 들은 팬플룻 소리 엄청 좋던데, 거리에서 공연 해보면 어때?” 예전 같았으면 “에이, 무슨 소리야.” 농담으로 넘겼을 텐데 돈이 다 떨어지자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사항이 되었다. 그래, 조금 부끄러운 게 굶어 죽는 것보다야 낫지. 


나는 첫 무대를 멜번으로 정했다. 멜번은 호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온갖 축제와 공연이 1년 내내 열리는 자타공인 문화도시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볼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거리예술에도 관대해서 시민들은 연주를 들으면 동전 하나라도 꼭 주고 갔고, 덕분에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예술가도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그러니, 내 첫 데뷔무대로 손색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앞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비발디 사계 중 봄>, 그게 내 첫 곡이었다. 사람들이 흘끗 거리며 지나가는데, 너무 창피해서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지나가던 멜번 시민들은 내게 활짝 웃어주었고, 사진을 찍거나 소리를 녹음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악기 이름이 뭐냐고 묻더니, “소리 정말 좋네요!” 한껏 치켜주고 갔다. 기분이 확 좋아졌다. 시간이 지날 수록 처음의 흥분과 떨림은 잦아들고, 오히려 대담해졌다. 중간에 삑사리도 좀 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천연덕스럽게 불렀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연주하고나니, 어느덧 날도 저물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드문드문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첫 공연 수입은 18달러. 첫 시도치고 나쁘지 않았다.


그 뒤 하루 1~2시간씩 내리 사흘을 더 공연했다. 그리고 60달러를 벌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숙박비를 충당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돈 보다 더 좋았던 건, 연주 덕분에 멜번 시민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교감할 수 있었던 점이었다. 그리고 돈 없는 상황에도 이런 잔꾀를 내어 기꺼이 즐겨준 나에게 참 고마웠다.  



외국에서 보낸 1년, 단 하나의 질문


호주에서 약 9개월간 지내고, 이후 뉴질랜드와 말레이시아 태국까지 여행하며 어느새 1년이 다 되었다. 그간 여행, 공부, 일 모두 정말 열심히 했다. 3일을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안에서, 석양지는 호주의 서부에서, 호주 원주민을 만나 함께 사막여행하면서, 태국에서 사기 당해 전 재산을 다 털렸던 경험까지 다양한 순간들 속에서 나를 돌아볼 기회가 많았다. 사람들에게 내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해주면 부러워한다. 


“참 버라이어티하게 사시네요.”


맞다. 하지만 모든 게 그냥 오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내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누리는 것만큼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어야 했다. 또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게 마냥 즐겁지 않았다. 혼자라는 게 주는 자유만큼 외로웠고,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짜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궁리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역시, 대가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하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드디어 나는 이제서야 내 소리를 약간이나마 들을 수 있게 됐다는 거다. 3일을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노을 지는 호주의 서부에서, 호주 가족들과 지내는 다양한 순간들 속에서 나를 돌아볼 기회가 많았다.


사춘기 이후 나를 괴롭혔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풀 수도 없는 위 질문을 두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여행도 그 때문에 꿈꾼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만나면, 어떤 실마리라도 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여행은 내게 답을 주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나 다양한 삶이 있는데, 넌 어떻게 살아 갈래?”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뭘 하고 싶고, 뭘 하고 싶지 않은지는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나를 좀더 표현하는 것. 어떤 모습들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보고 끌어안는 거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내 이야기의 시작이니. 여행에선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해야한다. 


자, 다시 새로운 길을 걸을 준비가 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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