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이 가자는 대로
여행갈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개는 그곳의 정보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인터넷을 뒤지고, 가이드북을 산다. 조언에 따라 일정을 짜고, 갈 곳을 정하고, 먹을 곳을 정하고, 잘 곳을 정한다.
그런데 좀 다른 사람도 있다. 일본 여행자들 사이에서 구루로 추앙받는 전설의 방랑자 '후지와라 신야'.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인도에 가기 위한 준비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후지와라는 이렇게 답했다.
"두 가지가 있죠. 버리는 일, 그리고 준비하지 않는 일.
준비하지 않는 것. 정보를 일체 얻지 않는 것이지요. 여행의 목적지에 관하여 정보를 얻으면 얻은 만큼 안심은 되겠지만 그 실상은 멀어져요. 열명의 사람이 똑같은 정보를 머릿속에 넣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을 경우, 모두 똑같이 밖에는 볼 수 없어요. 요즘 정보화 시대의 여행은 이 병이 무섭도록 깊습니다. 오히려 실상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실상이 자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정보로 보호막을 만드는 거죠. 그리고 나에게 필요없는 것들을 정리해보면서 진짜로 필요한 건 칫솔 정도라는 걸 알고 놀랬죠."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27쪽
나는 후지와라 편이었다. 세계 여행을 떠나며, 이번엔 가이드북없이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눈으로 세상을 보거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정보를 따라 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 오감으로 세상을 느끼고, 온몸으로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가이드북이 없어서 좋았던 건, 짐이 줄었다는 점. 그리고 '해야할 리스트'가 없었다 점. 사실 말이지, 가이드북은 시어머니 같은 면이 없잖아 있다. 많은 정보를 주는 대신, 봐야할것 해야할것 먹어야할것 등 내가 해치워야 할 리스트를 잔뜩 만들어주거든. 그걸 안하면 뭔가 찜찜해져서 그를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내가 정작 보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내 맘속에는 다른 이들이 만든 리스트로 가득해진다. 나는 가이드북이 주는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그런 맹목성이 싫었다.
그런데, 가이드북 없이 여행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처음엔 정말 막막했다. 일단 본능대로 움직였다. 해야할 게 딱히 없다보니,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을 갔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배가 고프면 현지인들이 줄레줄레 따라가서 먹곤 했다. 어디에서 묵어야할지 몰라서, 현지에 도착해 직접 돌아다니며 찾곤 했다.
어떻게 이동해야할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로 어떻게 이동해야하는지도 몰랐다. 현지인에게 묻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의 길치 장애는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모양인지, 다들 아주 잘 가르쳐줬다.
그래도 좋았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돌아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고, 대체 이런 자유를 어디서 맛 볼것인가. 내 마음대로 하루를 보낸다는게 참 행복했다. 내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다는 게 참 신이 났다. 그때 노플랜이 주는 여유를 만끽하며 '그냥' 흘러가는 게 어떤 건지를 맛보았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을 때였다. 숙소에는 일본, 미국,스웨덴, 독일 등지에서 온 세계여행자들이 있었다. 다들 론리플래닛 한권씩들로 무장하고 다녔다. 물어보면 다들 계획이 있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갈거고 뭘할거고. 내게도 물어본다. 넌 다음엔 어디갈거야? 뭐할거야?
"나?? 아무것도 계획도 없고 아무것도 결정된것도 없는데. "
다들 이런 내가 웃기다고 했다. 하지만 한달 째 말레이시아에 머물며 여행하던 존 할아버지는 "아무계획도 없이 여행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라며 내 편을 들어줬다.ㅎㅎ 그래서 나는 존할아버지가 좋았다.
하지만 가이드북이 없다는 건 엄청나게 불편했고 또 비효율적이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가이드북의 엄성된 정보에 따라 동선을 짜며, 불필요한 행동들을 하지 않았다. 봐야할 걸 봤고, 먹어야 할 걸 먹었다. 나에겐 그런 효율이없었다. 나는 직접 부딪혀봐야, 아, 이게 좋구나 이게 나쁘구나 느꼈다. 낯선 곳에 가면 뭘 해야할지,뭘 봐야 좋을지 몰라, 정처없이 거리만 헤매기도 했다. 뭘 봐야할지 몰라 내키는 대로 다니다, 나중에 떠날때 되서야 아 이걸 봤어야 했는데... 후회한 적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역시 사람들이 굳이 무거운 가이드북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있었어.
할 수 없이 나는 현지정보와 사람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행자 숙소로 가면 인터넷 + 가이드북등 최신 정보로 무장한 여행자들이 넘쳤다. 정보가 필요하면, 다른 여행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을 빌려보기도 하고, 인터넷이 되면 여러 웹사이트를 뒤져 정보도 모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도움을 얻었다. 숙소주인에게도 묻고 도시를 미친듯이 쏘다니며 현지에서 정보를모아가며, 어떻게 석달을 버텼다.
무작정 헤매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틀이 잡혀갔다. 새로운 곳을가면 나는 첫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도시를 쏘다니며 그곳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낀다. 이곳의 건물은 어떻게 생겼는지, 도시 구획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이들은 어떻게 쉬는지, 그런 것들을 관찰한다. 머리에 어떤 선입견이 없으니,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그대로 흡수되었다. 내 생각과 느낌들이 그곳을 자유롭게 파고들었다. 먼저 그곳의 냄새, 느낌, 색채가 생생히 마음속에 칠해놓고 책, 인터넷 등에서 외부 정보를 덧붙여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어느순간, 뻥~~~~ 하고 눈이 틔이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힌트들은 거리에 널려 있었다.
오랫동안 밤하늘을 보고있으면 눈동자가 조금씩 열리면서 더 많은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무얼 경험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했기 때문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가 아주 절절한 화두가 되었다. 절실하게 보다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일 점점 눈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새로운 정보로 읽혔다.
이를테면 간판. '간판' 하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간판에도 그 지역의 중요한 정보가들어있다. 간판이름을 지을 때 대개는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 유명한 것을 딴다. 만약 그곳에 유명한'이시스'여신(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여신) 의 신전이 있다면, 그곳에 아주 많은 가게들이 그 이름을 따서 간판을 만든다.
도로 곳곳에설치된 표지판들은 지도였다. 생각보다 표지판이 엄청 많았다. 그동안 이게 어떻게 안보였지? 싶을 정도로. 표지판은 내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봐야할지 알려줬다. 그 지역의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 시조가 누군지도 알 수 있다. 대개 그런사람들은 엄청난 숫자로 입간판을 세워두기 때문이다. 지역 여행사들이 투어로 내건 상품들도 좋은 정보였다. 간판보다 훨씬 상세했고, 이곳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봐야할지 우선순위가 나왔다.상품들이 배치된 배열을 보면, 어떤 루트로 봐야하는지 각이 나왔다.
또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의 흐름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 차가 많이 몰리는 곳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특히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들이 복작대는 곳이라면 두말할것 없이 진짜 명소였다. '이걸 해야해' '이걸 봐야해' 이런 생각없이 다니니까, 희한하게 더 많은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정보모으는 것에 조금씩익숙해지면서, 숙소도 현지에서 직접 구하기 시작했다. 현지에 도착하면 일단 숙박업을 하고 있는 곳에 들어가 현지 시세를 알아본다. 내 예산에 맞으면 그곳에 머물고 아니면 싸고 깨끗한 다른 숙소를 추천받았다. 그들 만큼 현지 숙박업에 밝은 이들이 없었다. 때로는 여행사에 들어가 괜찮은 여행자 숙소 정보를 얻기도 했고, 길 가다 다른 여행자가 보이면 그들에게 물어서 구하기도 했다.
맛집은 늘 현지인에게 물어봤다. 현지인이 추천해주는 곳은 실패가 없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덮어씌우기 마련인 바가지도 없었다. 현지인들이 줄서서먹는 곳은 틀립없었다. 덕분에 나는 가는 곳마다 저렴하고 맛좋은 곳을 몇 군데 찾아낼 수 있었다.
여행정보는 숙소주인이나 다른 여행자들에게 물어서 채웠다. 가이드북이 미처 빠르게 바뀌는 현지 사정을 못따라서 놓치는 정보들도 있기 마련이다. 숙소 주인은 관광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 수시로 바뀌는 현지 정보에 아주 밝았다. 그들 덕에 가이드북에 없지만 좋은 곳들도 갈수 있었다.
가이드북을 놓아버리니, 다른 모든게 내게 정보를 주는 또 다른 가이드북이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대신 다른 여행자며 현지인, 삐끼 등에게 물어서 정보를 구하다보니, 사람들과 섞일 기회가 더많았다. 모두가 든든한 내 정보통이었다. 한권의 책이 아닌, 세상 전체가 가이드북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여전히 시행착오는 많았다. 못 보고 놓친 것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내 오감을 더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주변 환경을 더 주의깊게 살피게 되었고, 내 안의 소리에 더 민감해졌다.
페루 갔을 때였다.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은 '아야쿠초'가 무척 가보고싶었다. '아야쿠초'는 잉카 문명 전인 와리 문명(WARI)의 중심지였다. 허나 지금은 페루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혁명활동으로 여행위험지로 분류된데다, 교통이 불편해 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국 가이드북에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고, 론리플래닛에나 약간 나올까. 결국 인터넷을 뒤지는 수밖에 없는데 아야쿠초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 대강 느껴 볼 수 있다. 밤새 몇번이나 버스를 갈아타며 갔는데, 누가 내 가방을 훔쳐갔다더라 하는 식의 여행담이 주였다. 그런데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나는 아야쿠초에 꽂혀있었다. 갈 이유도 없었고,누구도 추천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만 이틀을 고민하다 고민하다, 결국 가기로 했다. 내 직감대로 가보기로 했다.
가는 데만 무려 30시간이나 걸렸다. 정말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버스를 몇번 갈아타고 고생 고생 끝에 도착했다. 숙소도 인터넷에는 아예 나와있지 않아서, 짐을 끌고 시내를 1시간 돌아다닌 끝에 한 여인숙에 간신히 짐을 풀었다.
그런데 가고나서 후회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시장은내가 가본 시장 중 가장 재밌었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팔았다. 사람하나 없던 '와리 유적지'는 내가 본 어느 곳보다 아름다웠다. 그 드넓은 곳에 여행자가 나를 포함해 딱 두명뿐이었다. 푸른하늘 아래를 초록 들판을 걸어다니며, 내 세상을 만난 것처럼 아주 행복했다.
사람들이 페루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면, 나는 세상이 극찬한 마추픽추보다 이곳, '아야쿠초'가 좋았다고 말해준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곳에선 보지 못한 페루의 얼굴을 보았다.
난 대체 왜 가이드북없이 여행하고 있을까? 종종 자문했다. 돌아보니, 그를 통해 내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가는 훈련을 한게 아닐까싶다.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내 소리를 듣는 법을 익히기 위해.. 가이드북없이 여행하면서 나는 류시화 시인이 한 말을 100%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은 꼭 무얼보기 위해서 떠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낯선세계로의 떠남을 동경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자기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일 테니까.”
-류시화,<하늘호수로 떠난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