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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Aug 29. 2020

자폐아들에게 인생을 배운 어느 엄마의 일기

[북리뷰]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보물같은 책들이 세상엔 참 많다.

그런 책들을 발견해내면 정말 다이아몬드를 캐낸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 든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였다.



책 제목은 약간 식상했지만, 나를 확 끌어당긴 건 저자 소개였다. 


“… 아들의 자폐증에 저항하면서 이를 고치려 애쓰기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훨씬 더 큰 행복을 맛본다. 없는 것에, 모자란 것에 마음을 두거나 세상이 말하는 ‘보통’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그가 지닌 독특한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맛보게 된 행복이다. ‘무엇이 되어야만, 무엇을 이루어야만 행복하다’고 하는 생각도 내려놓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기로 하자 영혼의 자유도 맛보게 된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평가받는 자폐아인 아들이 준 놀라운 선물이었다.…” (책날개 저자소개 중)  


자페아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일기인데, 한 나절만에 다 읽었다. 저자는 아들 도시야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중증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저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남과 너무나 다른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작 바뀐 건 그녀 자신이었다. 아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오히려 더 큰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저자는 아들을 키우면서 더 큰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그녀가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히, 그러나 매우 깊은 통찰로 보여준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히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기 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를 수용해가는 자아성찰기에 가깝다. 심한 자폐증인 자식을 두고, 그 어미는 자식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한다. 그러고도 그녀는 나는 나를 위해 살아간다고 분명히 말한다. 자식을 핑계 삼아 살지 않고, 자식을 밑거름 삼아 더욱 성장한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겐 그녀의 자폐아 아들과 같은 '내면아이'가 있다. 남들과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웠던 내면아이. 저자가 자신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 내면아이도 함께 이해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인생이 진심으로 담겨 있는 책은, 그 자체로 큰 선물이고 축복이다. 써줘서, 너무 고맙다. 아래는 가슴에 와 닿은 문구들. 






나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착한 아이’로만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장녀이기도 했고, 주위에서도 틀림없이 제 몫을 할 아이라고 기대했으며, 나 자신도 그런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갔다. 학교에서도 그럭저럭 시험 점수를 잘 받아왔고, 게다가 우등생이라는 가면까지 썼다. 사춘기가 되어 부모에게 말대답 정도의 반항은 했지만, 도를 넘어 마음껏 행동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자신을 드러낸다거나 있는 그대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좌절이라면 대학 입시에 한번 떨어진 정도가 고작이었다. 확실히 안온하게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자폐증 아이의 부모가 되고 말았다. (29)  



슈타이너는 “아이는 아홉 살 때 루비콘 강을 건넌다”고 했다. (루비콘 강은 줄리어스 시저가 로마를 제압했을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건넌 강. 결정적인 어느 시점을 통과하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결별하는 첫발을 바로 이때 내딛는다는 것이다. 슈타이너 교육에서는 이를 ‘아홉 살의 위기’라고 부르며 이 무렵의 아이를 주의 깊게 살핀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신과 타인을 분간하여 볼 수 있게 되고 타인을 비판할 줄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아이는 상상 이상으로 고독하고 쓸쓸해 한다. (41)  



 예부터 일본에서는 언령(言靈)’(말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비한 힘)이라는 관념이 있다.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한들 거기에 진실은 없고 그저 기호의 나열만 있을 뿐이라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설사 말수가 적더라도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면 그 한마디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고 상대방의 가슴에 가 닿을 것이다. (44)  



사람들에게는 다들 각자의 돌고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돌고래는 결코 목적이 아니라 뭐랄까 삶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었다. 돌고래들과 특별히 드라마틱한 만남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돌고래에 이끌려온 이곳에서 만난 모든 것은 말할 수 없이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109)  



핵가족, 독자, 아버지의 부재, 모자 밀착-우리 집은 교육 전문가 여럿이 달려들어 규탄할 것 같은 온갖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낙제 가정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부족한 것이 채워지면 평온하고 무사하게, 순풍에 돛단 듯 인생을 보낼 수 있을까? 이 정도로 ‘바람직하지 않은 가정환경’이라 해서 나는 한 번도 뒤가 켕긴다거나,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상적인 가정이나 가족은 물론 있어야 마땅하고 또 멋지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이상적인 가족상과 그와 다른 현실의 가족 모습 때문에 이중으로 속박당하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을 해주지 않는다” “~이 없다”라고 부족한 것을 아무리 일깨워도 상황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있는 환경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바보 같다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성격이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숨을 쉬고 있다. 남편이 집에 없다고 해도 제대로 생활하며 먹고 살 수 있다. 그리고 남편이 집에 없는 덕분에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시간에 할 수 있다. 또 나도 아들도 운 좋게 건강을 타고났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122)  



아이는 사춘기에 ‘정신적으로 부모를 살해’ 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립할 수 없다고 한다. (...) 지금까지의 나는 얌전하고 말귀 잘 알아듣는 도시야만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장애를 가진 도시야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약간이라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범위에서만 받아들인다는 식의 조건을 나도 몰래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절대적 수용’밖에 없을 것이다. (122)  



예전에는 아이가 발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반사적으로 나는 나를 반성하곤 했다. 그런 버릇이 몸에 배여 심하게 자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나 자신을 벌해 봤자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좋지 않은 점, 문제라고 생각하는 점은 ‘뭔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내 의식을 바꾸었다. 사실 주위 사람들은 자신의 거울이고, 특히 아이는 자신의 뒷모습을 비추는 맞거울이다. (...)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묘미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더듬어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 아이 양육에 얽힌 여러 문제들도 “이건 무엇을 알게 하려고 일어난 일일까”라고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의외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아이 자신이 벽에 부딪혔을 때도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기에 앞서, “이 아이가 지금 넘어서려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마음으로 잠시 아이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문제로부터 도망가지 말 것또한 거꾸로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자기 자신을 잃지  반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나는 간신히 스스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그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125)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고 나면 나도 몰래 내가 말하고 쓴 내용에 이로운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 다행히 나는 좋은 친구들이 많아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지금도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는 것은 자기표현을 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있다. (…)

정서적으로 짜증이 이는 것을 달리 다스릴 방법이 없을 때는 몸에 무리가 가게 마련이어서 몸을 치유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과 몸은 흔히 표리일체라고 하지만,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반드시 몸에서 그 영향이 나타난다. (129)  


“내면을 바꾸고 싶으면 우선 겉모습을 바꿔봐. 힘들어도 싱긋 웃어보는 거야. 그러는 사이에 마음도 명랑해지거든.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해.” 겉모습은 내면에 영향을 주고, 내면은 겉모습에 반영된다. (…) 예쁘게 치장하거나 미소를 지어보임으로써 먼저 자신이 갑옷을 벗어낸 듯 밝고 부드러워지면서 내면이 치유되어 가는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되던 괴로움도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시험’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몇 번이고 그런 시련을 반복하다 보면 다시 폭풍의 한복판에 서게 되더라도 “이건 시험이야”라며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다.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자신의 재능을 펼쳐갈 수밖에 없으리라. (130~133)  



“좀 더 멍청한 얼굴을 해봐.”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잰 발놀림으로 이곳저곳을 찾아다녀도, 그것이 머리만을 키울 뿐이라면 언젠가는 넘어지고 만다. 친구의 그런 충고를 들었을 때의 내 상태가 바로 그랬다. 되는 대로 집어넣은 정보와 지식으로 완벽하게 머리만 큰 과분수! “아니... 난 정말 바보라니까....”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버릴 수 있는 유연함이 내게는 없었다. (137)



자신과 만난다는 것은, 숨은 재능이나 잠재되어 있는 즐거운 면만을 알게 되는 게 아니다.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직시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인정하는 일은 지옥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나’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용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오랫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알게 된 것이 있다.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단순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가장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을 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 ‘하고 싶은’것보다 ‘해야 할’ 일을 늘 우선에 두었다. 내면의 목소리는 거의 무시했다.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마음이 말해도 나의 이성은 “그러면 안돼! 그건 버릇없는 일이야”라고 퉁겨버렸다. 내 자신의 감각이나 직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시야라는 존재가 출현하고 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38,139)


내가 어떻게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설령 세간의 평가나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자신의 감각을 정직하게 따라가 보는 믿어보는  말고는  길을 열어갈 방도가 없을지도 모른다도시야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아는 마치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병사 같았고, 자기 아이는 고사하고 자신의 피부 감각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자기 찾기’는 그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하나하나 벗어버리는 일이었다. 지금은 사춘기라는 폭풍의 시기를 넘고 있는 중이다. 자기 아이 인생의 고비에 부모로서 몸을 돌보지 않고 대처하는 것도 물론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휘둘리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

자식이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마 이런 계기라도 없으면 더 더뎌질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가까스로 거의 벌거벗은 마음의 상태가 되었고, 앞으로는 내 발로 제대로 내 인생의 길을 걸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거리낌 없이 “나는 나를 위해 살아간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39~141)  



10년에 걸친 나 찾기에는 이런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흥미를 가진 일에는 주저하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염색과 직조를 좋아하긴 했지만 취미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시야에 대한 치유방법의 하나로 접한 아로마 테라피는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일로 하기에는 내 조건이 너무 버거웠다. 남편에게 이런 일로 의논을 하면 “이것저것 손대기만 하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처음엔 나도 내가 변덕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고, 그것이 내 결점 가운데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려고 친구들 만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이런 결점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유미코, 그게 결점일까? 사람은 어떤 진리에 도달하기까지 두 가지 방법을 취하는 것 같아. 하나는 한 가지 일을 차분하게 해나가는 도중에 그것에서 파생하는 다른 것들에도 흥미를 가져 시야를 넓혀나가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너처럼 자신의 흥미가 가는 대로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보고 그 중에서 필요한 진수를 얻어내는 유형이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확실히, 나는 각각의 것에서 뭔가를 배우고 그것에서 미완성 퍼즐을 맞춰나가는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친구의 말에 힘을 얻어 부족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자신의 길’ 찾기를 계속했다. 가슴 뛰는 일, 뭘 하든지 이것이 나의 유일한 판단기준이었다. (142~144)  



 “나의 천명은 뭘까? 정말 찾아질까?”

이런 나의 질문에 어떤 사람은 “사다리란 내가 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닐까”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명이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저편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145)  



아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 만큼 글 쓰는 것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지만, 딱 한 가지 불안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문장 공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표현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문장이라는 건 원래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불가능 한 거야”라고 친구가 충고해주기는 했지만,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어느 에세이 교실의 통신 첨삭 강의를 수강하기로 했다. (...) 반년의 통신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 강사는 “문장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사람을 만나고 싶다독자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에세이였습니다”라는 평가를 해주었다. 이것이었다. 나한테는 바로 이 말이 필요했다. 기술 운운하며 졸였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펴졌다. 내가 만들어낸 문장은 그 시점의 나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는 글을 쓰고 싶다면 평소의 자신을 연마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든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모든 것의 답이 역시  안에 있다고 한다면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  필요도 없다 이상 헤매는 일은 없어졌다. (...) 

내가 도시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도시야한테서 배운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와 도시야 사이의 ‘먼 약속’이 아니었을까? 글 쓰는 일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원천인 한, 나는 이를 나의 천명으로 삼고 싶다. (146,147)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적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귀가 안 들리는 음악가, 눈이 먼 화가, 신체가 부자유한 육상선수..... 상식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서 자신의 생명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 길에서도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존재가 암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이 바라는 길을 막는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외적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것은 사람을 어느 한 면에서만 파악해서 나온 관점이다. 어쩌면 그러한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 특유의 표현이 나올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으니까 하고, 좋아하니까 하는 것. 그저 그뿐이지 않을까? 거기에서 에너지가 나올 때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 작은 행복을 진심으로 실컷 즐기며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애당초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무슨 일이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이며, 동시에 그것은 결코 자기 혼자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도. ‘위대한 것’ 에 감사와 경의를 바친다.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151, 152)


  

 “ 이 아이는 말이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예전에 누군가 들려준 이 말은 나에게 아직도 힘을 주고 있다. 도시야가 태어나면서부터 ‘색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런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의 이치를 익히고 삶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 전에는 누구나 다 색채의 본질만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가지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도시야가 그런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살아가는 데 고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건 아니다. 벽에 부딪히는 횟수가 많은 만큼 무언가와 만날 기회도 늘어난다. 불행하지는 않지만 이런 아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보통 강인하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 

그래서 항상 도시야에게 묻는다. 왜 이런 경험을 하면서까지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거냐고. (…)

수채화를 그리면서 뜻밖에도 풍부한 내면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주었지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도시야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라고 단칼에 가르는 것은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지극히 협소한 범주 안에 한정 짓는 일이 될 것이다. (158, 159)  


<자폐증이었던 나에게>의 저자 도너 윌리엄스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당신들은 ‘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고 우리는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사는 세계가 다른데 자신들의 세계가 절대 옳다고만 하면서 우리를 억지로 언어의 세계로 질질 끌고 가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만 할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점차 생각이 바뀌어 지금은 전혀 그런 데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에 집착함으로써 도시야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지 못하거나 파묻어버릴까 두렵다. (173)  



나는 경쾌하게 살기 시작한 뒤로 어깨의 힘이 빠졌는지 아주 편해졌다. 그 덕분에 몸도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고 활기차졌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 빠져 있어도 “이건 뭔가가 없어지는 과정인거야”라고 저항하지 않고 흘려보내게 되었다. (…) 그런데 몸에 힘을 빼고 지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일부 차단하는 일이다. (…) 정보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정보가 실제 체험을 동반하지 않고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지식일 뿐이라면 특히 아이를 키우는 경우에는 문제가 많다. 등에 짊어진 봇짐에 이것저것 정보만을 채워 넣어 결국 너무 무거워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바깥에서 오는 정보로 아이를 보기 전에 우선 눈앞에 있는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봐야한다도시야의 경우도, 자폐정의 일반적인 증세가 어떻든 간에 도시야는 어디까지나 도시야일 수밖에 없는 것. 나는 자폐증이라는 틀을 아이에게 지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없이 아이를 또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수 있다. 온 세계에서 이렇게 간단히, 빨리 알고 싶은 정보를 모을 수 있는 환경에 있다 보면 정보 중독이랄까, 정보에 잠겨 있지 않으면 세상에서 뒤쳐질 것 같아 불안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는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감성도, 힘을 빼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192~194)  



어느 날 나는 ‘행복’(‘시아와세’로 발음)은 ‘행복’(역시 ‘시아와세’로 발음)이라고도 쓴다는 걸 알았다. 내 안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쓱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진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행복은 바로 ‘운명의 인연’에서 나온다. (…)

인간이란 누구나 현세에서의 역할이랄까. 자신의 숙제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태어나면 좋을까 하는 것까지도 안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좋은 부모답게’ ‘여자답게’ ‘착한 아이답게’와 같은 틀에 갇힐 필요가 전혀 없다. 모두가 자기답게 살면 자연스럽게 자기 생의 숙제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

도시야가 자폐증이란 장애를 가졌다는 것, 내 아이로 태어났다는 것,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런 '숙명‘은 바꿀 수 없겠지만, 자기 몸에 찾아오는 ’운명‘은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 행복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감성을 갖는 것, ’우리답게‘ 살아가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운명과 강고하게 맞서는 것보다 유연하게 바싹 붙어사는 것이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좋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 생활이라는 땅바닥에 착 발을 붙이고 자신을 똑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운명에 밀려가 버리든지, 미지의 유토피아를 찾아 뿌리 없는 풀처럼 이리저리 떠돌다 농락당하고 말 것이다. 유토피아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196, 197)  


유미코는 이 책의 에필로그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나는 너에게 새삼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널 만날 때까지는 이렇게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이것은 수많은 선인들, 철학자들이 구해 마지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가 가르쳐준 답은 “살기 위해 산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라는 건 사실 굉장히 간단한 구조인지도 모른다. 너와 사는 동안 모든 것을 ‘생명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너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생생하게 빛나는지 어떤지가 사물을 보는 판단 기준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에 정직하게 살 수 있게 되어 나는 깊이 감사한다.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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