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글리 May 10. 2016

내 길을 찾는 법

마음이 편한 길을 갑니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대학교 4학년때 한달간 재밌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도보인터뷰여행>이라고, 말 그대로 도보 여행하면서 자기 길을 만들어간, 사람들을 인터뷰 하는 것이었다.


계기는 취업캠프였다. 당시 학교에서 보내주는 1박 2일의 취업 캠프를 다녀왔는데,  잠 안자고 배운 것들이 죄다 '이력서 잘쓰는 법', '좋은 인상 남기는 법' 등 이었다.   4년의 대학 생활 끝에 남은 건 결국 얼마나 나를 잘 포장해서 기업이 나를 사가지고 가게 만들까라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치열한 취업 전선에선 내가 어떤 인간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건 상관없는 듯 보였다. '우린 냉정해져야 해.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런 목소리만 힘을 얻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면접 스터디하고, 토익 점수 올리는데만 쓸수 없었다. 지금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건지 고민하고,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데 써야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안하면 대체 언제 할 것인가? 나는 내가 직접 내 삶을 만들어가고 싶지, 누군가 만들어주는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그게 아직 불확실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떻게 비싼 값에 기업에 팔릴까 보다, '어떻게 내 길을 만들어갔고 내 꿈을 따라 갔는지' 얘기해 줄 사람들.  눈을 반짝이며 " 난 말이지, 이렇게 길을 닦아왔는데"라는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듣다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내 계획을 알려, 도움을 구했다. 3명 정도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이들을 섭외하고 따로 인터뷰 기법도 공부한 뒤, 짐을 꾸려 출발했다. 그때가 2006년 10월이었다.


농업의 메카, 홍성의 '풀무전공부'를 가다

첫번째로 추천받은 곳은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전공부>라는 농업학교였다. 풀무학교 전공부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풀무학교)의 대학과정으로, 귀농자들을 대상으로 농업에 대한 실습과 교양, 다양한 이론을 가르친다. 정식 학력으로 인정되진 않고, 인가만 받아 교육중이라고 했다. 얼마전 귀농을 한 지인이 여기서 귀농공부를 했다며 가보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해줬다.

풀무 전공부 본관 전경 ©복음과 상황 이종연

서울에서 걸어서 출발한지 이틀만에 충남 홍성에 도착했다. 내가 풀무전공부에 도착한 건 11시가 다 돼가는 으슥한 밤이었다. 감사하게도 미리 연락받은 선생님이 입구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내가 선생님들 기숙사에 짐을 풀도록 도와주고, 늦은 시간임에도 다른 선생님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선생님들 대부분 서른이 넘어보였는데, 그중 앳되 보이는 여자선생님이 한 명 있었다.  알고 보니 24살, 나와동갑이었다.  그녀를 보자, 내 궁금증이 발동을 걸었다. 나는 아직도 내 길을몰라 방황중인데, 대체 어떻게 '농업학교 선생'이 되겠다고 결심했을까?  대체 어떻게 자신의 길을 발견했을까?



24살 농부처녀의 말, 내 마음이편한 곳을 따라가요

그녀는 이곳에서  조선생이라고 불린다.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에 이름은 밝힐 수 없고, 편의상 조선생이라 부르겠다) 농업 대안학교인 풀무고를 나왔고, 풀무전공부를 수료하고 일본으로 2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내가 잘 몰라 그렇지,  풀무학교가 알고보니 대단한 곳이었다. 무려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농업기술학교로, 농약, 비료를 엄청 써대던 70년대에 이미 유기농법을 도입했을 정도로 시대에 앞서 있었다. 그녀는 오전에는 농사짓고, 오후에는 귀농자들에게 원예를 가르쳤다. 그녀는 시골출신도 아니고,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토박이라고 했다. 아니,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까? 궁금증이 더해졌다.


운좋게도, 그날 밤 나는 조선생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방에 들어와 둘이 있게 되자, 참았던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어떻게 지내나요? 근데 여기살면 힘들지 않나요? 도시에서 친구들처럼 살고 싶진 않나요?” 조선생은 수수한 인상만큼 말도 군더더기 없이 조곤조곤 하였다.


“음... 저도 보통 친구들처럼 살고 싶죠.  저라고 힘들때나 아쉬울때가 왜 없겠어요. 친구들은 내가 뭐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예쁜 옷 입는 것도아니고, 화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의아해하죠. 근데 가끔 서울 가보면 숨이 막혀요.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것들-별 보는거, 공기, 이런 세세한 게 더 귀하거든요. 그걸 아니까, 추스르면서 사는거죠.”


이제 정말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다.

“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 길을 택했어요? 나이 들어 시골에 내려와 살고 싶어하는 이는 많아도 20대 젊은 나이에 시골에서 농사짓고 싶어하는 사람은드물지 않나요? "  


나는 그녀의 입에서 ‘농촌을 제일가는 생태현장으로 만들겠다’ 이런 거창한 목표가 흘러나올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생의 답은, 의외였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일할 기회가 주어졌고 지금 하고 있는 거죠. 보면 알겠지만, 사실 여기에서 사는 게 그렇게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도 아니에요. 생태라 해도 맨날 라면 끓여먹고. ㅎㅎ 사소한 걸로 싸우고 그래요. 근데 도시에서는 돈없으면 할 수 없는 게 많잖아요?  여기선 돈없어도 할 수 있는게 많아요. 무엇보다 여기 있으면 제 마음이 편해요. "  


나는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냥 내 마음이 편한가. 사실 '내 마음을 따라 간다' 이런 말은 자기계발서에서 지겹도록 보았다. 그런데 그 흔한 말이, 왜 이렇게 충격적인지 모르겠다. 거창한 목표따윈 없다는 조선생의 말들이... 커다란 망치가 되어 내 머리를 땅, 하고 때렸다.  


저기, 색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요?

어질어질한 밤을 보낸 다음날.

이곳에서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데,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인문학부터 철학과 농업이론 등을 공부한다고 했다. 밭도 매고, 소도 먹이고, 논에 벼도 심는다.

풀무 전공부 현장실습 ©복음과 상황 이종연

수업을 어떻게 하나 보고 싶어 하던 차, 수업을 청강할 기회를 얻었다. 마침 철학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평소 나는 귀농자들은 뭔가 ‘색다른 사람’ 일 것이라 생각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선택을 한 만큼, 다른 뭔가가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질려 숲에 들어간 헨리 데이빗 소로처럼 특별한 철학이 있거나, 평생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니어링 부부같은 소박하지만 범접못할 꿈 같은 말이다. 최대한 방해되지 않으려고, 입 꾹 다물고 조용히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50대 수강생 중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아니, 여길 어떻게 오게 됐나요?"  

“색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요.” 라고 했더니, 그 분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글리씨는 무슨 색입니까? 여기 색다른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색다르다’ 는 말 속에 이미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잣대로 나눠놓고 있었다.  

“아,그렇네요. 죄송합니다. 그냥, 여기 오신게 평범하진 않은 거 같아서요. 그런데 어떻게 귀농을 선택하신거에요?”

이번엔 전체 수강생(그래봐야 예닐곱명이지만)에게 내가 물었다.  다들 대답이 간단했다.

"그냥." 혹은 "내 체질에 맞아서."


 이틀을 함께 지내면서 보니, 그들은 남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똑같이 ‘어떻게 살건가?’ '행복하고 살고싶다‘와 같은 비슷한 물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저 귀농이란 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내 길 찾는데, 거창한 명분, 목적같은 건 없어도 되는구나. 가장 단순한 걸로도 찾을 수 있구나. 길을찾는 게 이렇게 단순했다. 내 말을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선택의 기준이 남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다는 조선생처럼, 나도 좀 멋져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풀무전공부를 떠났다.


한달간의 여행, 내가 찾은 답

그 뒤로 나는 계룡산을 거치고, 포항과 경주를 갔다가 부산까지 걸어내려가며  흥미로운 인물들을 몇명 더 만났다. 평생을 전통무예에 몸바친 사람도 만났고, 20대에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산에 들어와 기사회생한 청년도 만났다. 삶을 꽃처럼 공들여 가꾸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도 만났고, 좋아하는 책을 쓰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도 만났다. 남들이 죽었다 깨나도 못한다는 민요판에 뛰어들어 결국 해낸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한편으로 갈수록 공허해졌다.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 들으면 재밌고 배울 것도 많다. 어떻게 그 길을 택했을까 영감도 얻는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는데?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거 아니냐? 는 반문이 자꾸만 생겨났다. 나는 어딘가에 정답이 있고, 매뉴얼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발견한건. 정해진 아무것도 없다는 거 뿐이었다.


사람들이 묻는다. 여행하면서 사람들 많이 만났느냐고. 나는 답했다. 그래, 많이 만났다. 그런데 나를 더 많이 만났다고. 게슈탈트 심리학에선 “모든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이란 말을 하는데,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길을 몰라서 헤맨게 아니었다. 내가 살고 싶은 길은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 자체였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은데, 그저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걸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겪은 일들, 내가 갔던 곳...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한달간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내 인생을 내 식대로 사는거야. 내가 가진 걸,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쓰며 사는 거지."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거.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는거다. 바깥 세상을 아무리 헤매봐야 답을 찾겠는가? 이거야말로 물길 위에서 있으면서 길을 묻고 있는 꼴이 아닌가. 애쓸수록 이 한가지만 확실해졌을 뿐이었다.  '근데,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구나.'  그게 힘빠지고, 억울했다. 이쯤되자, 더이상 어디론가 가고픈 맘이 사라졌다. 나는 수첩에 이렇게 적고, 한달간의 도보인터뷰여행을 접었다.

"수많은 사람이 있고, 무수한 방법이 존재하네. 이미 난 길은, 다른 사람이 닦아둔 편한 통행로일 뿐.모든 사람이 그 길로 가야할 필요는 없지. 내가 갈 길은. 내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 길은 돌고 돌아서 결국 나에게로 가고 있다. 뭔가 점점 재밌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변화가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생존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