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세계사 2. 흑사병,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를 열다
요새 질병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다. 특히 세계사를 바꾼 질병, 전염병에 관심이 많다. 인구 절반이 죽어나간 대유행에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했고, 이후 어떻게 사회가 변화했는지 궁금해서다. 세계사 흐름을 살펴보면 어떤 재앙이나 질병으로 인구의 1/3이 죽으면 결코 이전의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다. 사회의 축이 바뀌기 때문이다.
오늘은 중세를 끝장낸 '흑사병'을 정리했다. 흑사병은 무려 300년이나 창궐하며 당시 중세를 떠받치고 있던 2개의 큰 축 - 기독교와 봉건제도를 붕괴시켜 버린다. 고작 전염병 하나가 사회를 뒤흔들고 통째로 바꿔버린 것이다.
"코피가 났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뜻했다. (...)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나타난 가래톳 (림프절이 부어 생긴 멍울) 몸 곳곳으로 퍼저나갔으며, 이후 시커먼 점으로 바뀌었다. 팔과 넙다리에 시커먼 점들이 나타나 하나로 합쳐지고 커지면서 거의 3일 이내에 전부 죽어나갔다. "
지오바니 보카치오가 1350년경에 저술한 자신의 책 <데카메론>에서 흑사병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변색된 부분이 괴사가 일어나면 죽어나갔기 때문에 흑사병은 'Black Death'라고 불렸다.
얼마나 진행속도가 빨랐던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아주 건강한 젊은이도 아침에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저세상에서 조상들과 만찬을 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347년~1351년까지, 고작 5년 사이에 2천만명 이상이 죽어나갔는데, 이는 당시 유럽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가족 중 하나가 흑사병을 앓으면 집에 못질을 해서 아예 단체로 격리시키기도 했다. 이로인해 가족 전체가 몰살되었으며 이는 사망률을 높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환자와 함께 있는 경우 뿐만 아니라 멀리서 보기만 해도 병에 걸렸다. 이 때문에 환자는 간호해줄 사람도 없이 죽어갔고, 매장에 입회할 사제도 없었다. 부모는 자식을 돌보지 않았고, 자식도 부모를 내팽개쳤다. 자선은 소용 없었고, 희망은 사라졌다."
-<대외과학> 중에서 (프랑스 외과의사 '기 드 숄리아크' 기록)
놀라운 건 흑사병이 매우 오래 갔다는 점이다. 가장 맹위를 떨쳤던 건 14세기였지만 17세기까지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발생하며 봄이면 찾아오는 손님처럼 지속적으로 발병했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722년까지 간헐적으로 100여차례 발생하며, 7천5백만명 ~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누구도 왜 이 질병이 발생했는지 몰랐다. 부랑자, 나병환자, 유대인이 병을 퍼뜨린다는 소문이 돌아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집시들을 죽이거나, 마녀들의 탓이라고 하여 마녀사냥까지 이뤄졌다. 이 병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의사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옷과 가면을 쓰고 다녔고, 부자들은 질병이 없는 곳으로 멀리 피신을 갔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대로 방치됐고 곳곳에 시신이 쌓여 썩는 내가 진동했다. 이 가혹한 역병이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해 스스로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고행자들도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가진 것을 모조리 써버리거나 성적향락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기말 풍경이었다.
대체 흑사병은 어떻게 전파되고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흑사병의 전염 경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것이다. 중앙아시아에 떠돌고 있던 페스트균이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을 따라 1343년경 유럽 크림반도로 전파됐다는 것. 이후 크림 반도에 정박하고 있던 화물선 안의 쥐들에게 페스트균이 옮겨졌고, 곧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간다. 3년만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러시아까지 흑사병이 전파되며 당시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다. 흑사병은 이후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로도 번져나갔다. 당시 4억 5천만명으로 추산되던 세계인구는 14세기를 거치며 1억명 가까이 줄었다.
흑사병의 원인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로부터 500년이 더 흘러서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세균론이 공식화되면서 질병을 야기하는 미생물을 규명하게 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시궁쥐에 기생하는 동양진드기가 페스트균을 옮기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시궁쥐는 아시아를 거점으로 지내다 15세기 무렵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유럽 등지로 진출했고, 19세기에는 미주까지 진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헤엄에 능해 섬까지 자력으로 이동할 수 있고 영하 20도에서도 생존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흑사병은 쥐 벼룩과 소형 포유동물, 사람 세 가지 경로 모두를 통해 전파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처럼 동물과 인간이 함께 걸리는 질병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고 부른다.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인수공통전염병이었다.
흑사병은 사실 14세기에 처음 발생한게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3번이나 대유행했는데, 첫번째는 '유스티아누스 흑사병(Plague of Justinian)'으로 불린다. 6세기 동로마 황제였던 유시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기간에 이집트에서 처음 유행이 보고 되었다. 2년 만에 당시 세계인구 절반에 가까운 3천만 ~ 5천만의 목숨을 앗아간다. 당시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한창일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루 1만명씩 죽어나갔다"고 기록했다. 이 흑사병으로 동로마제국의 군사력을 급격히 약화됐고, 이후 이슬람에게 패한 요인이 되었다.
흑사병은 첫 유행 이후로도 수십년 간격으로 반복해 나타나며 750년 유행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600년경에는 유스티아누스 흑사병으로 당시 서유럽 인구 50%에 해당하는 1억명까지 인구가 줄었다. 2세기 이상 지속된 흑사병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끝내고 중세 암흑시대를 열었다. 더불어 지중해 연안 무역이 위축되고 대부분의 국가가 물물교환으로 퇴행했고, 도시가 몰락하고 봉건제가 자리잡게 된다.
중세유럽에서 발생한 2차 대유행때는 무려 2천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는 당시 유럽인구 (7500만명)의 1/3에 해당하는 인구다. 1347년부터 1722년까지 흑사병은 간헐적으로 발생하며 사람들을 괴롭혔다. 유럽만이 아니라 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줬는데, 당시 원나라의 허베이 지역에 흑사병이 창궐해 인구 90%가 사망했다. 1353~1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지역에서 2천5백만 이상이 죽어나갔다. 흑사병은 원나라 멸망 이유중 하나로도 꼽힌다.
흑사병의 3번째 유행은 1860년 중국에서 발발했다. 3차 유행은 철도와 기선에 의해 2차때보다 더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됐다. 만주에서 1910년에서 1911년동안 6만건의 폐렴 흑사병이 발생했고, 1920년부터 1092년까지 다시 1만건의 흑사병이 발생했다.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은 거의 다 사망했다.
흑사병은 오늘까지 완벽하게 근절되지 않았다. 최근 발생된 사례로는 1944년의 인도에서 발생한 폐렴 흑사병으로 14,000명이 사망했다. 이후 2005년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흑사병으로 보이는 질병이 발생해 수천명이 이주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3년 2118건의 흑사병례와 182건의 사망례를 보고했다. 이중 대부분은 마다가스카르와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보고된 것이다. 흑사병은 제때만 치료된다면 항생제로 충분히 치유가능한 병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치사율이 30~60%로 높은 편이다. 지금도 중국 네이멍구와 티베트 등지에서 간간히 감염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세계사 흐름을 살펴보면 어떤 재앙이나 질병으로 인구의 1/3이 죽으면 결코 이전의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다. 사회의 축이 바뀌기 때문이다. 중세를 떠받치고 있던 축은 크게 두가지, 기독교와 봉건제도다.
당시 교회는 '질병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회개할 것을 강권했다. 하지만 교회 사제들마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고, 신에게 기도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고행도, 종교의식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흑사병을 더 빨리 번지게 만들었다. 죄를 지은 자만이 아니라, 죄 없는 어린 아이들도 죽어나가자, 신의 징벌이라는 말도 무색해졌다. 모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신은 무력했고, 교회의 권능은 땅에 떨어졌으며 자연히 믿음이 쇠퇴한다.
수 많은 농노가 죽고 노동자 수가 급감하면서 생산인구가 줄어들자 유럽 중세의 근간이던 봉건제가 흔들린다.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두 가지가 크게 달라진다. 하나는 농업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이전에는 노동집약적으로 짓던 밀농사, 쌀농사가 줄어들고 손이 덜가는 포도농사가 늘어난다. 이로서 와인이 발달하게 된다. 또 노동력이 귀해지자, 농노들의 협상력이 강해졌고 이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노동이 가치가 있다는 걸 인식한다. 인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처우도 개선돼 더 많은 임금이 지불되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수준도 함께 향상되었다.
많은 저명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줄줄이 사망했기 때문에, 후학들은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당시 라틴어로만 전수되던 지식들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자국어로 기록되면서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 중세에 명맥이 끊겼던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더불어 과학의 부활도 생겨났다. 신 중심의 사고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자라면서 과학중심적 사고가 생겨나고, 이는 16, 17세기 '과학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흑사병은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공중보건 조치를 수립하는데도 기여했다. 중세유럽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오수와 하수 처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 거리로 다 흘려보냈고, 씻지 않는 걸 '순결하다'고 생각했다. 더러운 도시환경과 최악의 위생상태가 흑사병을 더 빨리 전파시켰을 것으로 본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흑사병에 맞서 '격리'와 '오염제거'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대응했다. 딱히 효과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중보건이 무지했던 시절에 격리와 방역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했던 계기가 되었다. 1347년 유럽에 흑사병이 상륙했을 때, 역병이 도는 곳에서 온 선박의 입항을 거부하고 40일동안 입항하는 배들을 대기하도록 했다. 이탈리아어로 40일은 quaranta인데, 여기에서 현제 '격리, 검역'을 뜻하는 'quarantine'이 나왔다.
흑사병은 기원전 5천년부터 시작되었던 인구증가를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기존의 유럽사회를 붕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신아 아니라 인간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었고 과학과 예술을 토대로 한 화려한 르네상스가 부활하게 했다.
[참고]
기사, [21세기 흑사병] 한 세기 건너뛴 흑사병 전세계로 확산될까, 동아사이언스
위키 & 나무위키
책, <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시대의 창, 2018
책,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 어윈 W. 셔먼, PNU Press, 2019
방송, <벌거벗은 세계사>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로 본 팬데믹 시대의 미래', 장항석 교수 강연
방송, <팟캐스트 일당백>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들', 정박, 정영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