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세계사 3. 인플루엔자 (독감)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질병은 종종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그려보기 위해 역사에 영향을 준 전염병들을 살펴보고 있다. 과거의 전염병에서 인류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극복해왔는지를 보면, 우리의 행보에도 좋은 힌트가 될 것이다. 오늘은 현재 진행형인 인플루엔자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현대에 들어 영양이 좋아지고 생활환경이 개선되며 많은 질병들이 힘을 잃었다. 과거 인류를 위협했던 흑사병, 콜레라,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도 이제는 치료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하지만 문명화되고 규모가 커진 사회에는 언제나 또 다른 새로운 질병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사망자 기준으로 지난 100년간 가장 치명적인 질병 10가지를 발표했다. 1위는 에이즈, 2위는 스페인독감, 이후로 아시아 독감, 홍콩독감, 제7차 콜레라, 신종인플루엔자, 에볼라, 콩고홍역, 서아프리카 뇌수막염, 사스SARS 순이다. 뇌수막염, 콜레라를 제외하면 모두 '바이러스성' 질병들이다.
바이러스는 난적이다. 이들은 크기가 매우 작아 기침이나 재채기를 타고 쉽게 확산된다. 지금처럼 세계적인 교류가 활발한 시기에는 과거에 비해 전세계로 전파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실제 사스SARS가 발발하고 일주일이 채 안돼 비행기를 통해 30개국으로 퍼져나갔다.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세균 bacteria' 과 '바이러스 Virus'의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세균은 단세포 생물체로 스스로 살아가고 번식하는 자립형이다. 반면 바이러스는 핵산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로 이뤄져 숙주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크기도 다르다. 세균은 100만분의 1미터로 마이크로미터 단위이고 바이러스는 10억분의 1미터로 나노 단위다. 때문에 전자현미경으로 봐야 보인다. 세균은 2차 감염이 거의 없지만 바이러스는 대부분 2차 감염이 된다.
바이러스는 세균성 질병과 달리 백신을 만들기가 아주 어렵다. 표면 항원을 수시로 바꿀 수 있어서, 다음에 어떤 혈청형의 바이러스가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새로운 조합을 갖춘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이전의 백신은 무용지물이다. 때문에 예방백신과 치료제까지 존재하지만 지금도 인플루엔자는 잊을만 하면 나타나 대유행을 일으킨다.
최근 100년간 바이러스성 질병은 대략 10여차례 창궐했다. 굵직한 건들은 다음과 같다.
1889년에는 러시아 독감이 유행해 1백만명이 사망했고, 1957년에는 아시아독감으로 2백만명이 죽었다. 1968년에는 홍콩독감으로 또 1백만명이 사망했고, 2009년엔 멕시코 독감(신종플루)이 있었다. (다행히 이때 사망자는 2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중 최악으로 꼽히는 스페인 독감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고작 2년 동안에 2,5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했지만, 스페인이 이 질병을 주로 보도하면서 '스페인독감'이라는 오명이 붙여졌다. 스페인독감은 시카고에 있는 미군 병영에서 처음 발생하여, 병사들을 따라 프랑스에 이어 스페인으로 전해졌고, 곧 유럽 전역에 퍼졌다. 당시 조선도 일본을 거쳐 전파됐는데 '무오년 독감'으로 불렸다. 이 독감으로 조선에서만 약 14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예방백신도 치료제도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시신을 묻을 곳도 없었고,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공중보건 조치가 내려졌다. (마스크로 방역하는게 지금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니...)
1918년 한해에만 미국에서 67만명이 인플루엔자로 사망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인구 50명 중 1명꼴이다. 스페인 독감의 위력이 어느정도였냐면, 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앞당겨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
보통의 인플루엔자는 노약자나 병자를 희생양으로 삼지만, 스페인독감은 오히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게 달랐다. 젊은 층이 더 많이 죽은 것을 두고, 과활성화된 면역반응으로 인한 독성쇼크 증후군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노년층보다 청년층에서 면역반응이 훨씬 활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만들어지는 장소를 제공하는 숙주는 대개 오리나 기러기 같은 '물새'다. 야생 조류 몸 안에 존재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잘 감염되지 않지만, 돼지나 가금류 등의 징검다리를 거치면서 사람에게도 감염이 된다. 철새의 분변으로 오염된 물을 가금이나 돼지가 섭취하면 바이러스가 체내로 유입된다. 가금류는 금방 죽지만 돼지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새, 돼지, 사람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서로 섞이는 숙주가 된다. 이렇게 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한데 섞여 새로운 바이러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유전자 재편성'이라 부른다.
지난 50년간 유행했던 인플루엔자의 팬데믹은 대체로 중국에서 나타나 홍콩을 1차 관문으로 하는 양상으로 전파되었다. 광둥성과 같은 중국 남부에서는 가금, 돼지, 사람이 서로 가까이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1997년 홍콩독감의 유행은 기러기, 쇠오리, 메추라기가 한데 섞여 있는 중국 남부 가금류 시장에서 유전자 재편성으로 만들어진 신종 바이러스에서 시작됐다. 2001년 신종 H5N1 바이러스도 홍콩의 가금류 시장에서 발견되었다. 2006년 1월 H5N1 바이러스는 터키 동부에서 시작돼 유럽에도 출현했다.
이 때문에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을 쓴 '어윈 W. 셔먼 교수는 새로운 인플루엔자가 나타나면 그 출처는 중국의 어느 지방일 거라고 예측한바 있다.
중국 광둥성 어딘가 가금류를 통해 처음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만들어지고 전파된다. 몇 명이 죽어나가지만 당국은 사람간 감염은 없을 거라고 애써 위안한다. 하지만 이 독감이 아시아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 전파되고, 특히 비행기를 통해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간다. 호주, 유럽, 아프리카, 미국, 남미 등 수만,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감염되어 죽어가지만 대책이 없다. 백신은 몇 달이 걸려야 개발되고 치료제는 턱없이 부족하다. 환자가 너무 많아 격리 효과가 불충분하며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병원은 과부하가 걸리고 학교, 기업도 정지된다.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공공집회만이 아니라 악수까지 기피한다.
-<세계를 바꾼 12가지 질병> 중 316~317p
저자는 이 시나리오는 허구라고 밝혔지만 불과 12년뒤에 실제 일어난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의 판데믹 상황과 매우 흡사해서, 읽으면서 소름돋았다
인플루엔자(독감)가 대유행하려면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사람들이 겪어본 항원과 전혀 다른 항원을 가진 새로운 형의 바이러스가 나타나야 한다. 둘째,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병원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 기침이나 재채기, 악수와 같은 가벼운 접촉으로도 쉽게 감염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항원, 병원성, 빠른 전염성... 코로나19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을 6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동물 사이에서만 전염되는 경우, 2단계는 동물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는 경우, 3단계는 사람간 전파가 증가한 경우, 4단계는 급속히 전파돼 전세계적 감염이 일어날 수 있는 초기, 5단계는 동일권역 2개국 이상 퍼져 대유행에 접어든 경우, 6단계는 판데믹 Pandemic으로 여러 대륙의 국가에 퍼져 대유행하는 단계다. 현재는 판데믹, 6단계에 해당한다.
어떤 집단에 전염병이 새로 유입될 경우, 한 명의 감염자가 몇 사람에게 전염병을 전파시키는가 하는 수치를 '기초감염재생산수(Ro)' 라고 부른다. 이 값은 전염병이 얼마나 빨리 확산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2003년 사스SARS는 질병 초기단계에서 Ro가 3.0으로 예측되었고, 격리를 통해 적절히 통제됐다. 그해 7월 사스의 Ro는 1 미만으로 감소했고, 질병은 사그라들었다. 코로나19는 2019년 초기단계 Ro가 2.68로 예측되었다. 코로나19는 발생 1년반이 지나도록 여전히 1미만으로 감소하지 않고 진행중이다.
이번에 전염병 관련된 자료와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이, 많은 전문가가 이미 이같은 판데믹 상황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때에는 몇 시간 만에 바이러스가 지구 끝에서 끝으로 감염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느때 발생할 건지 예측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인플루엔자가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망가뜨려 놓을 것이란 점이다."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 (어윈 W. 셔먼, 2007) 중에서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진화하며 변종을 낳고 있고, 과학자들은 인류가 앞으로도 바이러스를 퇴치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호하게 결론내린다. 국제보건기구는 21세기를 두고 '전염병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대규모 참극을 벌일 질병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주범은 바로 변종 바이러스일 것이다."
-<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저, 2018) 중에서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인류가 정복한 질병의 숫자는 매우 적다. (천연두 정도?) 그래도 한때 항생제와 백신의 개발, 경제적 발전으로 전염병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에볼라, 에이즈 같은 새로운 전염병이 생겨났고,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슈퍼박테리아도 출현하고 있어 결코 안심할 수 없게됐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앞으로도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은 많다고 예측한다. 인간이 오만해질 수 없고 오만해져서도 안되는 이유다.
질병은 우리 눈을 피해 빠르게 진화하는 중이며, 여전히 비극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현재도 그 비극의 한 가운데를 헤쳐가는 중이다.
참조
책, <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시대의 창, 2018
책,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 어윈 W. 셔먼, PNU Pres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