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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Oct 17. 2022

나의 때가 반드시 온다

내 길에 회의가 생긴다면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여러분은 고흐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제가 기억하는 건 딱 3가집니다.  광기, 가난, 자살. 

뉴욕현대미술관 (MOMA)에서 그의 그림을 직접 보았을 때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그가 쓴 편지 구절을 접하고 그의 삶에 급관심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거대한 슬픔들까지도 말이다."


위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고흐는 18년동안 네살 터울 동생인 테오에게 668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는데요 중에 고흐의 삶과 예술을 잘 보여주는 편지를 선별해  책으로 엮어낸 겁니다.  이 책을 통해 고흐의 뿌리깊은 고뇌와 광기를 이해하게 되었고, 지독한 가난과 고독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고자 노력했던 인간 고흐의 진면목을   있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다"


고흐는 1853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납니다. 엄격한 칼뱅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결국 화가의 길로 들어서죠. 고흐는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생전의 삶은 고통과 비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고흐는 스스로 '새정에 갇힌 새'로 비유합니다. 평생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먹고 마시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로 모든 것을 그림에 투자한 덕분에, 37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10년동안  900점 가량의 유화와 1100점이 넘는 스케치를 남깁니다. 2주에 하나 꼴로 작품을 완성한 셈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초기에 고흐는 자연과 농부들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처럼 고흐는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렸지만, 제대로 인정받질 못했습니다. 화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정이 곧 돈과 연결되기 때문이죠. 그림에 대한 정열은 누구보다 넘치는데, 세상은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내내 두 가지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물질적인 어려움 vs 색에 대한 탐구


예술에 대한 고집스런 열정이 물감을 사기도 빠듯한 경제 사정과 늘 충돌했기 때문에 고흐는 더 많이 고뇌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만다. 묵묵히 한 길을 가면 무언가를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라며 의지를 다지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사람들이 자신을 '게으르다, 실패한 인간이다' 라 생각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때문에 자주 우울해했죠. 


고흐는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데다, 고집스런 성정으로 가족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거든요. 훗날 갈 곳없는 매춘부를 들여 같이 살면서 가족과는 더욱 멀어졌다. 그중에서도 고흐가 유일하게 연락하고 애정을 지녔던 사람이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였습니다. 테오는 미술판매상으로 형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테오가 없었다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흐는 동생을 의지하고 친구처럼 여겼습니다.


또 생계를 거의 전적으로 동생에게 의지했는데, 그때문에 늘 미안해했습니다. 그때문에 더 자주 우울해했죠. 고흐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더 많이 작업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그를 더욱 더 작업에 매진하도록 한 원동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흐는 모든 것을 바쳐 그림을 그리지만, 끝모를 좌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동생에게 “아무래도 요령있게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다.” 라고 토로하기도 하죠. 고흐는 실제로 신경쇠약에 시달렸는데, 정신이 명료할 때는 그림 그릴 때 뿐이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욕망은 매우 높았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나 매우 혹독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를 가치있다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과없이 빈손으로돌아와 그래도 먹고 자고 돈을 쓰는 날이면, 내 자신이 못마땅하고 미친놈이나 형편없는 망나니, 혹은 빌어먹을영감탱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185쪽)

울고 있는 노인 (1890) 좌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생 레미 시기에 그린 것이다.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


고흐는 열등감, 죄책감, 자격지심 등 극도의 피학적 성격을 보입니다. 때문에 굳이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너무 큰 고통 속에 빠뜨립니다. 마치 고통을 찾아다닌 것처럼 보일 정도죠. 이런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는 그냥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없었던 걸까? 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맘껏 누리고 표출할 수 없었을까? 외로움, 가족과의 불화가 있더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그냥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면 어땠을까?'  

고흐의 자화상.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고  입원했다가, 퇴원 뒤 그린 그림이다.


그러다 고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를 찾아보면서, 고흐가 왜 스스로를 패배자로 생각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비하하는 패턴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원인으로 꼽힙니다.  


하나는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입니다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는데, 이것이 고흐가 높은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도록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고흐는 평생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죠. 


또 다른 하나는 죽은 형입니다. 고흐에겐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도 고흐였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형은 죽었고, 1년 뒤 같은 날 고흐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고흐가 죽은 아이 대신 준 선물이라 생각해서 죽은 형의 이름을 붙여주고, 자주 형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보지도 못한 형의 존재가 고흐를 내내 누르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자신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무덤을 보며 자란 고흐에게 슬픔과 우울이 깃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고흐도 말미에 그를 알게 된 거 같은게편지에 이런 말을 합니다.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견디고, 반감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 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262)


고흐는 평소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색을 탐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청색과 노란색을 주로 썼는데, 심리학자에 따르면 청색은 체념과 슬픔을 극복하고, 노란색은 병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안정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고흐는 색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내고, 감정과 심리적 갈등을 녹여내었죠. 이처럼 그가 가졌던 고뇌가,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붓터치로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역시 삶은 아이러니입니다.

해바라기. 1888

결국 그는 말년에 신경쇠약으로 프로방스의 셍레미에 있는 한 요양원에 들어갑니다그 즈음 그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만, 고흐는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이 자신을 치료해준다고 믿어서,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짧은 기간동안 무려 146점의 그림을 그려냅니다.  이때 그의 작품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는데,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였죠.

 

말기 편지에 가서는 고흐는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며, 더 이상 견딜수 없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결국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스스로 총탄을 쏘고 말죠. 고흐가 자살했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화가가 자신의 몸에 그렇게 총을 가까이 겨냥하기도 어렵고 손에 그을음이 없다는 점, 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살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아무튼 그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여관까지 돌아왔고, 죽고싶다며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은 영원하다.”


고흐는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날 밤 숨을 거둡니다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1년 뒤, 건강악화로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죠.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7월) 고흐가 남긴 마지막 작품. 누렇게 익은 밀밭 위로 까마귀떼가 날아오른다.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


고흐가 생전에 판 그림은 단 한 점

실제로는 유화가 한 점이고, 열 두점의 스케치를 그려서 판 적이 있습니다만어쨌건 고흐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실패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도 같다"고 하면서도 “내 직업이란 게 더럽고 힘든, 그림 그리는 일 아니냐.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고흐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에 대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된다고 여겼고,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도 말했죠. 하지만 미친 듯한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고, 죽어서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별이 빛나는 밤에>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정신병원에서 그렸던 그림입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좋은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고, 고흐 자신도 그 작품은 '실패'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1941년부터 이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상시전시 되었고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죠. 1973년에는 모국 네델란드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기에 이르고, 고흐는 서양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흔히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실을 빨리 맺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뒤늦게 결실을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흐의 경우, 그 때가 조금 늦게 왔을 뿐입니다.   


사실 나의 길을 간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내 길을 간다고해서 누가 알아주거나 박수쳐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37년간 지독한 가난과 고독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모든 걸 쏟아부은 그를 보며,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할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고통속에도  절룩거리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한 초라한 영혼이 희한하게도 누구보다 큰 힘을 주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설령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거나, 세상이 아직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을 굴하지 않고 재미지게 갈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진인사대천명. 할 바를 다 한다면,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



*참고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고흐의 DVD

고흐: 화려한 색채로 심리적 불안을 치유한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화가

고흐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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