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호 Jan 11. 2019

어쩌면 당신의 삶에서 마주칠

1-1. 첫날의 처음

그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이 이야기를 들어 두는 편이 좋을 거라 확신하는 건,
이제부터 시작할 모든 이야기의 상황 속에 나 아닌 그대가 있었다면
바로 당신이 깨달았을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보았던 것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스스로 성장케 하는 무언가가,
이번엔 당신 마음의 문을 두드리길 소망하며,
오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그날,

일본의 어딘지 모를 역에 난 멍하니 서 있었고, 품에는 태어난 지 백일도 안된 딸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아내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냐고 조심스레 묻고 있는데, 그걸 도무지 모르겠어서 얼빠진 모습으로 한참을 서있는 중이다.


우리는 한 2시간쯤 전, 나리타 공항에 내렸었다. 양가 식구들께 작별 인사 올리고 인천공항을 떠나 일본에 막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엄청나게 복잡한 도쿄의 열차 노선도 앞에서 기가 죽은 내가 고르고 고른 열차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거였다. 이걸 타고 반대편 종점으로 와 버린 나는, 이게 다 통제 가능한 상황이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는 바보의 얼굴을 하고 거기 서있었다.

 

이민 가방에, 배낭 가방에, 기저귀 가방에, 족히 작은 리어카 한대 분은 되어 보이는 짐을 아내와 주렁주렁 나누어 들고 아이까지 들쳐 맨 채 시작된 나의 일본 유학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쩌면 당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긴 이야기, 그 출발은 바로 이날이어야 할 것 같다.




1-1. 첫날의 처음


일본은 난생처음 와본다. 일본에서 무언가를 공부하려고 계획했던 건 더욱 아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저 모두들 아는 만큼의 정보와 한국 사람이라면 대체로 가지고 있는 정도의 정서를 가진 사람, 일본 말도 글도 전혀 모르던 내가 어쩌다 그 시간 이민 가방을 끌고, 아이를 안고, 길도 못 찾아 아무도 없는 엉뚱한 곳에 초라하게 서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그로부터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안녕하세요 조태호입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낯설다. 유학 직전, 난 TV 리모컨을 돌리다 보면 가끔씩 눈에 띄는 교육 방송 진행자였다. 당시 M사 기술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 업무로 출연한 TV 방송의 호응이 좋아 추가 방송이 잡히더니, 조금씩 방송이 늘어 몇몇 프로그램에 동시에 나오는 중이었다.


그전엔 평범한 영문과 학생이었다. '영어 음성학'과 '고전 영문학' 수업이 몹시 따분해, 당시 화제였던 '플래시'라는 소프트웨어를 공부해 본 건데, 운이 좋아 한국 인터넷센터에서 주최하는 어떤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플래시를 제작해 판매하던 미국 회사에 채용이 되어 일을 시작했다.


졸업과 함께 취업도 하고, 외국계 회사 다니며 TV에도 나오니, 주변에서 보면 썩 잘 나가는 듯싶었을 테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슬금슬금 올라와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래 장면들을 보자.


상황 1. 

본사 사람들과 영어로 회의를 하는데 모두가 뭐라 하다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눈치 상 누군가가 내게 뭘 물어본 것 같은데, 난 조금 전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지도 이해를 못했다.


상황 2. 

회사에서 주최해 수백 명이 모인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프로그래머 한 분이 손들고 질문을 한다. 난 질문의 요지도 파악 못하겠는데 다들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질문이 끝났고 내 답을 기다리며 모두가 다시 날 쳐다본다.


당신의 인생에서는 맞닥트리지 않기를 바라는 이런 상황들이 불행히도 그 당시 몇 차례 찾아왔다. 뭔가 대답을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를 스스로도 모른다.


단순히 좀 창피한 것을 넘어, 이러한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에 크고 작은 스크래치들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보이는 것보다 실제의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알아본 사람들의 속닥거림으로 인해 움츠러들었고 뭔가를 들킬 것 만 같은 불안함이 따라다녔다. 더 많이 배워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시간도 능력도 모자라던 상황은 마음의 골만 점점 깊이 파던 시기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초조해할 건 없었다. 뽑혀 나가 방송도 진행한 걸 보면 사내에서 나름 인정받는 부분도 있었을 테다. 허나 불안한 내 눈에 그런 것들은 들어오지 않는다. 많은 일들을 한 참 더 겪은 후에야, 우리를 종종 따라다니는 이런 불안함과 초조함 뒤에는 어떤 생각지도 못한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당신과 이것을 나누고 싶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튼 거기까지 가려면, 내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한다.

 



"혹시 일본 가서 박사 공부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

어느 대학의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은 건,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 인사하며 지내오던 이 교수님은 교회에서 만난 사이다. 예배 후 교회 입구에 서서 '문부성 장학생'이란 제도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을 해 주셨다. 일본의 국비 장학생이라고 했다. 자기의 '건너 건너 아는 일본인 교수'가 마침 지금 한국인 장학생을 뽑고 싶어 하는데, 원하면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오케이 하면 일본의 문부성 장학생이 되어 박사 과정 졸업 시까지 학비 면제에, 매달 생활비도 받게 될 거라는 거다.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던 때다. 이 말이 '구원의 동아줄' 같았다. 그 자리에서 덥석 잡았다.


국제 구호 개발기구에서 커리어를 쌓던 아내도 마침 큰 애를 임신해 출산을 앞둔 시점이었다. 아내는 육아휴직을 하고, 나는 당차게 사표를 낸 후 함께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 대화를 나눈 지 딱 6개월 후,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내가 불안해하는 아내와 함께 나리타 공항 반대편 종점에 멍하니 서있게 된 거다.

 



 

미로 같은 노선도를 비장한 각오로 노려 보고 있다. 같은 정거장에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라인이 특급, 급행, 일반, 익스프레스 별로 들어온다. 시스템의 나라답게 잘 짜인 스케줄이라고 하는데 일본어가 미숙했던 내겐 그저 풀기 어려운 하나의 미로였다.


목표는,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오차노미즈'라는 역으로 가는 것이었다. 여기에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가 위치해 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겨우 역에 도착한 건, 공항에 도착한 후 4시간쯤 지나 서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양 손에 잔뜩 짐을 쥔 채 학교로 향하는 내 뒤를 아내가 아이를 안고 묵묵히 따라왔다. 두리번거리던 눈에 바쁘게 이동하는 일본 사람들이 한가득 들어온다. 공중전화를 찾아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니, 누군가 나갈 테니 기다리라고 답한다. 등에 맨 가방이 막대기로 찌르는 듯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커다란 꿈을 안고 일본의 첫날을 맞이한 그 날,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 한편은 두근거렸다.

 

꿈에도 몰랐던 거다.


연구실이 아닌 혹한의 서울 길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갈 남자가,



2년 후의 내가 될 줄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