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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Jan 17. 2019

죽음은 가볍다

1-2. 어떤 고난의 이유

"2천만 원 더 만들어 오라고. 처음이라 잘 몰라? 니 머리론 이해가 안 돼?"

 

술 취해 혀 꼬인 소리를 하는 이 사람은 영상 의학 센터를 개업하려는 고객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겨울, 나는 이 분에게 MRI 장비를 팔려하고 있다.


MRI 한대의 정가는 10억 원이 넘는다. 가격대가 워낙 높아 어느 정도 가격 협상이 있긴 하지만, 이미 기나긴 흥정 끝에 1억 원 이상 가격을 내린 상황이다. 2천만 원을 더 만들라는 건, 가격을 더 깎은 계약서를 들고 다시 찾아오라는 이야기다. 소형 아파트 전세 값을 깎아 주었는데 중형차 한 대 값을 더 깎으려 한다. 장비 가격 인하는 영업 사원의 재량이 아니다. 회사에 돌아가 부장님께 또 사정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가격 내리면 누가 못 파니?'라며 험한 소리만 들을 게 뻔하다.


이 고객은 십여 년 이상 경험을 쌓은 후 이제 자기 사업을 하려는 중이다. 그래서 시장 사정에 훨씬 더 밝다. 평소엔 점잖다가도 내가 찾아오면 짜증 난 얼굴로 심하게 말을 하곤 했는데, 가격 협상을 직접 할 수 있는 부장급이 안 오고 이야기도 안 통하는 말단을 자꾸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부장님은 대형 병원만 맡는다. 이런 개인 병원은 대리/사원급 담당이다. 고객이 보기에 무능하고 회사 보기에도 어설픈 초보 영업사원이 이 잠재 고객을 따라다니며 접대한 지가 벌써 3개월째다. 사실 장비를 팔아도 월급을 받을 뿐, 한 푼도 더 가져가는 건 없다. 하지만 꼭 계약을 성사시켜야 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급히 건너와 의료기기 영업사원을 시작한 지난 몇 개월간 내가 회사에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다. 가까스로 구한 이 일자리마저 잘릴까 봐 걱정이다.


소주 반 병의 주량을 가진 내가, 술 잘 마시는 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건 정말 힘들다. 폭탄주를 끝도 없이 만든다. 한잔만 마셔도 어지럽고 집에 가고 싶은데, '안 마시냐?' 한 마디에 연거푸 폭탄주를 들이켠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선생님 댁까지 잘 부탁해요." 대리 기사에게 부탁하며 고객을 집으로 보내는 것으로 그날의 업무를 마쳤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이제 내 대리기사를 전화로 부른 후 차로 가서 의자를 젖히고 눕는다.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갑자기 꾹꾹 눌러두었던 술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와 속이 답답하고 토할 것 같다. 외투를 벗어던지고 차의 창문을 끝까지 연다. 영하의 찬 바람을 훅- 하고 들이 마시니 좀 낫다.


얼마  대리 기사가 온 것 같다.


그런데,

그사이 치솟은 취기로 인해 난 그만 정신을 잃어버린다.

대리기사는 주차장 구석에 세워놓은 차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


열린 창문으로 겨울바람이 쏟아 들어와 시동 꺼진 차 안은 얼음처럼 차갑다.


체온이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나는 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죽음은 거창하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때에

이토록 가볍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1-2. 어떤 고난의 이유


"조~ 태호상? "
"하이 예스"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하이(はい)도 아니고 예스(yes)도 아닌 "하이 예스"라는 해괴한 답을 하며 돌아봤다. 오차노미즈역을 가까스로 찾은 우리, 공중전화 부스 앞으로 마중 나온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키 작고 스포츠머리를 한 앳된 모습의 청년이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모를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외국에서 막 도착한 유학생 행색의 우리를 알아본 사람은 앞으로 소속될 연구실의 대학원생 다나카상이었다. 영어로 간단히 소개를 하더니 따라오라 했다. 첫 과제였던 '학교 찾아가기'를 마쳤음에 우선 한숨이 좀 놓였다.

 

10분쯤 걸으니 연구실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서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봐도 철거 직전의 폐건물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낡아서 떨어진 외벽은 이빨 빠진 모양으로 방치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유리창이 없어 보일 만큼 대부분의 창문에 테이프를 붙여 놓았거나 아예 깨진 상태로 그대로 두고 있었다. 다나카상이 날 흘끔 보더니 설명한다. 지금 새 연구동을 짓는 중인데, 옛 건물의 철거 허가가 나오지를 않고 있단다. 신속한 철거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관리도 안 하고 계속 쓰면서 일종의 '시위'를 하는 중이라 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계단을 뒤따랐다. 먼지가 덩어리로 굴러다니고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던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옥상 구조물이 나왔는데 연구실은 그 안에 위치해 있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바닥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건물 뒤편에서는 새 건물을 짓느라 공사장 소음이 시끄럽다.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이라 청소하는 이가 없다는 무미건조한 설명 너머로 아이를 더욱 힘주어 안고 있는 아내가 언뜻 보였다.


도쿄 의과 치과 대학교, 생체 의용 공학 시스템 연구실과의 첫 만남은 이랬다. 연구실 가운데 놓인 책상에 앉아 교수님 오시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구석에는 인공 눈알에 여러 전선을 연결한 실험 도구가 괴기스럽게 놓여 있었고, 옆에는 저체온증 방지 장치라고 설명된 복잡한 기계 위에 환자복을 입은 낡은 마네킹이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복도 저편에서 무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삐그덕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다가오는데 교수님이라며 다들 일어선다. 지도교수가 될 와카츠키 교수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다. 점점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중얼거림도 선명해졌다. 50대 중후반쯤 되어 보였고, 구부정한 거북목에 160 정도 되는 키였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가 몹시 기름진 채로 뭉쳐 있어서 언뜻언뜻 민머리가 드러났다. 어깨에 하얗게 내려온 비듬이 자꾸 눈에 들어왔는데, 정말 특이한 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데도 멈추지 않던 그 중얼거림이다. 우리 앞에 와서도 무언가를 계속 중얼중얼거려서 심지어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일어를 아직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을 뭐라 한 건지 정말 궁금했지만,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연구실과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아까 옆에서 굴러다니던 눈알이 어떤 논문에 발표되었고 이로 인해 누가 박사를 받아 교수가 되었는지를 알고 나니 그나마 괴기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낡은 책상의 '혼수상태 마네킹'은 수련의 도중 적성이 안 맞아 의용 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우에다 상의 박사 논문을 위한 것이었는데 우에다상은 장차 의료 상담도 해주는 고마운 선배가 된다. 알고 보니 다나카상을 포함해 그곳에서 소개받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도쿄 의과 치과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른 의대를 졸업하고 의공학에 관심이 있어 온 재원들이었다. '플래시' 하다 온 난 뭔가 싶을 만큼 잠시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건, 미국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던 내 영어가 이들 사이에선 꽤 잘하는 영어였다는 것이다.




첫인상은 그리 무섭기도, 불안하기도 했지만 나는 조금씩 연구실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서 행했던 두 가지 연구의 테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료 시설이 노후한 섬과 도심 병원을 연결하는 원격 의료 상담 시스템의 구축이다. 그때는 인터넷 브라우저만 있으면 화상 채팅은 물론 판서 기능까지 되는, 혁신적이고 거의 유일한 방법이 플래시를 이용하는 거였다. 수개월 후, 이 연구는 완성되어 일본 최남단의 오키나와 간호 대학과 도쿄 의과 치과 대학을 연결하는 원격 의료 시스템이 시연되었다. 연구실 전원이 도쿄에서 대기하고 나랑 교수님이 오키나와로 날아가 시연을 하던 그 날, 여러 매체에서 찾아와 인터뷰를 해갔다. 이 성과는 도쿄와 오키나와의 각종 언론에 실릴 만큼 성공적이었다.


두 번째 테마는 치매 노인을 위한 가상현실 시스템이다. 치매에 걸리면 이를 간호하는 가족들의 고통 또한 심해진다. 이에 중증 치매 환자를 위해 가상현실 룸을 집에 만들고 환자가 주인공이 되는 가상현실을 만들어 가족이나 의료진이 원격에서도 환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지금의 '포켓몬 고' 같은 증강현실 기능이 그 당시 플래시로 가능했었다. 이 연구는 이후 시나가와에 위치한 치매 노인 재활 센터에서 직접 시스템을 가져가 테스트하는 단계까지 갔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면, 아기 캐릭터가 다가온다(양옆). 다리 재활을 겸하기 위해 만든 축구장 증강현실에선 차는 속도에 따라 공이 다르게 날아간다(가운데, 옆에서 설명하고 있는 나)


두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플래시를 썼다는 것. 당시 연구실에는 교수를 제외하곤 플래시라는 툴을 제대로 아는 사람 조차 없었다. 따라서 두 프로젝트 모두 회사 다니며 익힌 나의 경험에 크게 의존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불러온 이유였나 싶을 만큼, 오자마자 쉴 틈 없이 프로젝트를 주길래 이를 해 나가며 하나씩 연구 성과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유학 도중 갑자기 귀국한 것은, 연구와 전혀 관계없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다. 도대체 왜 나는 2년 후 여기서 쫓겨나 서울 한 복판에서 갑작스러운 영업을 하다 죽어가게 되는 걸까? 


어이없게도 문제는, 

매일 아침 듣는 일본어 수업 덕분에 일어 실력이 부쩍 늘어나면서 생겼다.


유학생활이 뿌리째 흔들리고

내 가치관 모두가 혼란에 빠질 만큼 충격에 휩싸인 건,


늘 흘려듣던 와카츠키 교수의 중얼거림


완전히 알아들은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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