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들의 방식
지금 들은 게 맞는지 긴가민가하며 교수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확인이라도 하듯,
교수는 내쪽을 향해 이렇게 반복했다.
"위안부는 다 매춘부들이라고"
1-3. 그들의 방식
일본, 이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한다는 건, 그들만의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들어야 하는 연구실의 미묘한 분위기였다.
연구실 구석에는 뜨거운 물을 데워서 하루 종일 보온하는 커다란 전기 포트가 있었다. 어느 날 선배 중 한 명이 나를 그리로 데려간다. 물을 받아 차를 우려내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간다. 뭐지? 하고 겸연쩍게 서있다가 나도 자리로 돌아온다. 다음 날 와보니 물 끓이는 포트에 전원이 꽂혀 있지 않았다. 물이 차갑다. 선배들이 포트에 손을 대더니 나를 슬쩍 쳐다본다. 혹시 나보고 아침에 물을 끓이란 소리인가?
다음날 아침, 8시 반쯤 서둘러 학교에 도착했다. 물을 새것으로 채우고 포트 전원을 켜니 하나둘씩 선배들이 들어온다. 눈치 빠르게 알아듣고 포트 켜 놓은 걸 은근히 알아주길 바라며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들이 오자마자 포트에 손을 올려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이쪽을 쓱 쳐다보고는 그냥 돌아간다. 가서 포트에 손을 대보았다. 뜨겁지가 않고 미지근하다. 그러고 보니 전기 포트가 워낙 크고 오래된 거라 물을 다 데우는데 30분 이상이 걸린다. 그렇다면, 선배들보다 최소한 30분 일찍 와 찻 물을 데울 것, 그리고 물 온도를 통해 내가 온 시간을 알 수 있으니 늦지 말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 모르겠다. 그냥 말을 하지!
다음날 아침 8시, 더 일찍 가서 포트에 전원을 켜고 물을 데웠다. 기다리면서 다시 선배들을 보았다. 물이 뜨거운 것을 확인한 선배들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평온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들의 방식은 이랬다. 말을 하지 않지만, 말을 한다.
의과계열에서 공학을 연구하는 이 연구실은 선후배 관계가 군대 내무반 같이 엄격했다. 찻물 데우라는 무언의 지시를 알아들은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8시 이전에 연구실에 가서 찻물을 올렸다. 퇴근도 언제나 선배부터 한다. 연구실 전원이 매일 함께 점심과 저녁을 먹었는데, 저녁 식사 후 한두 시간쯤 지나면 교수가 연구실에 한번 더 들린다. 이게 모두 가도 좋다는 신호다. 졸업을 앞둔 선배부터 하나씩 집으로 가고 연구실 막내인 나는 당연히 맨 마지막이다. 그렇게 막내는 연구실 문을 열고 연구실 문을 닫는다.
어느 날은 바로 위 선배인 다나카상이 돌아가지 않고 아무 할 일 도 없는데 가만히 있는다. 오늘은 뭔가 할 일이 있나 보다 싶어, 짐을 챙긴 후 먼저 간다고 하니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나를 붙잡고 전혀 쓸데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무의미한 대화를 무려 한 시간 가까이나 한다. 중간중간 시계를 보는 걸 통해 느꼈다. 아, 아무래도 나와 함께 몇 시까지 있다가 돌아가라는 지시가 있었나 보다. 다음부터는 다나카상이 돌아가기 전에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안 것은, 연구실에 교수님 전용 모니터링 시스템이 있어서 모두의 퇴근 시간을 체크한다는 거다. 또 교수실에 스피커가 있는데 연구실의 모든 대화 내용이 교수실에 실시간으로 전송된다. 어느 날 교수가 직접 보여주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구적이고 공식적인 이야기 외에는 연구실 내에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 즉 너 물 끓여, 너 청소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꽉 짜여 돌아간다. 이 모든 지시를 큰소리 한번 안 하고도 알아듣는 게 정말 신기하다. 일본 사람들끼리 쓰는 'KY'라는 말이 있는데 쿠키요메나이(空気読めない)를 줄인 말이다. 직역하면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 즉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연구실에서 KY가 되면 낙오다. 특별히 말로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선배들의 모든 행동에 민감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뒤쳐지면 신호가 온다. 이 신호를 알아듣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하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일본 유학생활 초기, 열심히 읽은 건 책이 아니라 '공기'였던 듯. (사진출처:일본 위키피디아)
여기서 유일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교수뿐이다. 교수는 연구실 안에서 왕을 넘어 신과도 같은 존재다. 신이 현신하여 끝없이 말을 쏟아 내니, 신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선배들은 그 속에 담긴 혼내(本音, 속뜻)를 알아듣기 위해 늘 긴장 상태다. 나는 못 알아듣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지만, 일어를 공부해 가면서 그 중얼거림이 점점 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게 쓸모없거나 들어서 좋을 게 없는 것들, 예를 들어 선배들을 향한 불만과 질타, 다른 교수 비난, 혹은 뉴스에 나오는 이슈에 대한 욕설 등이어서 들어도 대게는 흘려 넘겼다.
'위안부는 모두 다 매춘부들이야'
그런데, 이 말이 갑자기 날아와 내 귀에 꽂힌 거다. 도무지 못 들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자리로 와서, 내 뒤에 서서, 내 뒤통수에 대고 한 말이었다. 아마 TV로 한국의 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뉴스를 보고 나오는 길인 듯했다. 뭔가 화가 나서 입천장에 힘을 주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듯한 그 특유의 중얼거림이 그날따라 내 뒤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이 교수가, 극우 보수주의 자라는 건 그간 사회적 뉴스들을 들먹이며 목소리를 높이던 걸 통해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런 이슈를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한국 사람인 나를 너무도 당황케 만들었다.
첫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난 그냥 '평범한' 한국 사람이다. 일본에 대해 모두가 가진 정도의 정서를 가졌는데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이 내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되게 말하는 것이 몹시 불쾌하다는 거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전 한국에서 아내와 함께 본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라는 영화를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나도 따라 울었었다. 그분들 앞에서도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서 그러듯이.
한편으로는 아득한 두려움 같은 것도 느껴졌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럴 리가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느낌은 조금 더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책상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책 한 권이 놓여 있어서다. 제목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
뉴스를 통해 이 책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해방시켰다'거나,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모인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극우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 사람이 쓴 책이다. 한국에서는 '청소년 유해 간행물'로 지정되었는데, 일어로 번역되면서 일본에서 출간 후 4개월간 35만 권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이 내 눈앞에 있다. 교수가 놓고 간 거란다. 책을 들고 목차를 읽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 학생으로서 교수 눈에 잘 보이고 이들의 일부분이 되어 무사히 졸업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깨달은 것 같다.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학위를 못 받거나, 친일파가 되거나.
이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댔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었다. 책을 받은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제 교수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했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으므로 한국인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 조선의 국민들은 대부분 최극빈층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해방시킨 일본은 한국에게 사죄할 필요가 없다..' 책에 나온 그 내용이다. 나는 매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아마도 멍하니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 시간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이야기를 안 하겠지 하는 기대도 했다. 그러나 교수는 틈만 나면 내 뒤에서 이야기를 반복했다. 교수가 내게 진짜로 원하는 것이 혹시 자존심을 버리고 지금처럼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있으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더 지내던 어느 날이다.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날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메이지 대학 교내 식당을 찾았었다. 부근의 교내 식당 중 제일 괜찮다고 평가하던 곳이다. 식당은 학생들로 붐볐고 와카츠키 교수와 연구실 학생들이 테이블 두 개를 붙여 모여 있다. 언제나 그렇듯 나 말고는 모두가 일본인들이다. 이 날 교수의 이야기 주제는 여러 가지를 돌고 돌아 "일본이 조선에게 해 준 좋은 일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일 합방은 조선에 아주 잘된 일이며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했다.
당시 상황 상 친일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위안부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는 전쟁 중에 군인들이 얼마나 성폭행을 많이 자행하는지를 나라별, 역사별 예를 들며 한참 설명했다. 이런 군인들의 생리상, 그들을 위해 매춘부들을 모아 따라다니게 했던 건 일본군이 해낸 혁신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위안부란 게 다른 게 아니라 그때 따라다닌 매춘부들을 말하는 거야.
그때 돈 벌어 놓고서는 허황된 이야기를 지어낸 거지.
그게 다 보상을 받아 내려는 건데,
그 조선의 매춘부들이..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교수는 틈만 나면 그랬기에, 그날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니 자존심을 남김없이 다 버려야 학위를 준다고.
그런데 유독 그날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고개 끄덕이며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소란스러운 교내 식당 안의 모든 일본인들이 하나가 되어 웅성거리고 수군대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던 연구실 선배들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이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뛴다.
하지만...
잠시 그러고 서있었을 뿐이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자리를 뛰쳐나와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속이 너무너무 상했다. 뭐가 속상한지도 모르겠었다. 뭐라 받아치지 못한 게 속상한 건지, 이 상황에 처해진 게 속상한 건지, 이것을 하소연할 사람이 없는 게 속상한 건지..
다음날 아침,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나는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학교가 아니라 도서관으로 향했다. 교수에게 메일을 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두 번, 세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결국 완성한 메일에는 이런 글이 담겼다.
'교수님, 저는 한국인으로서, 교수님의 역사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곳에 학문을 공부하려고 온 것이지, 교수님께 역사를 배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의 개인적인 역사관을 한국인인 제 앞에서 하시는 것은 몹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수년 후 다시 한번 끄집어 내게 되는 이 메일의 결론은, 나는 공부만 하고 싶으니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발소를 찾아가 머리를 짧게 깎았다. '그들 방식'대로 내 의사를 표시하고 싶어서다.
답장은 없었다. 초조함 가운데 하루를 더 보낸 다음날 아침, 조심스레 다시 학교로 향했다. 선배들이 하나둘씩 아침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내 머리를 슬쩍 보긴 하지만 아무런 언급은 없다. 어제 왜 안 왔는지, 그 전날에는 왜 그랬는지,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다.
교수도 이내 들어왔다. 역시 내 머리를 쳐다봤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이것저것 중얼거릴 뿐이다. 엊그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없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냥 이렇게 지나가다 보다 했다.
그렇게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접어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내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살 것 같았다. 내 의견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고마움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더 늦게까지 공부했고 연구실에서 밤샘도 여러 번 했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더 적극적으로 하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통장에 장학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005년 4월,
매월 정확한 날짜에 입금되어 식비, 생활비를 해결해 주던 문부과학성 장학금이 이날 입금되지 않았다. 대학원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았다. 직원의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교수가 내 문부성 장학생 신분을 영구히 박탈했다고 했다.
교수가 보낸,
그들 방식의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