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금, 여기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리는 흔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
특히, 화려했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돋보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가 하는 가장 보편적인 착각 중 하나다.
1-5. 지금, 여기
까짓 거 돌아가지 뭐.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잘 나갔는데.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순간부터, 옛 회사에 다시 복직해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전화로 복직 가능 여부를 의논했을 때의 지사장님 반응도 긍정적이었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전에 공헌했던 부분도 있으니 복귀가 순조로울 거라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TV만 틀면 나오던 2년 전 기억을 이리저리 꺼내어 곱씹으며 귀국할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이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회사가 경쟁사에 피인수되어 합병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IT 탑뉴스에 떠있었다. 놀란 마음에 조금 가까웠던 직원에게 전화해 보니 기존에 있던 사람들 자리도 보전이 불안한 상황이라 답한다. 완전히 같은 일을 하는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지니, 각 보직 인원도 갑자기 두배로 늘어난다. 절반은 잘려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인 거다. 이런 혼란 가운데, 결국 복직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뭐든 할 일이 없을까 싶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예전에 우리 회사의 제품을 떼어 판매하던 국내 총판 중 한 곳에서 기술 지원직을 뽑는다는 구인 광고였다. 재직 시절 좋은 관계로 지냈던 협력사라, 지원서를 넣어보았다. 바로 전화가 오더니 출근하라고 했다. 출근 해 보니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상당히 좋다. 이게 바로 밴더사 출신 프리미엄인가 혼자 생각하며(소프트웨어를 제조하는 밴더사는 '갑', 이를 파는 총판은 '을'의 관계로 규정되던 시절)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정돈했다. 오후에 부장님이 찾아오더니 마침 M사에 볼일이 있으니 함께 다녀오자고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내가 떠난 회사를 다시 찾았다. 도착하니 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강 과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강 과장은 나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 동료이지만 인품이 좋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날, 강 과장의 태도를 보고 나서야 난 내 문제를 깨달았다. 이 후배 과장 앞에서 '을'이 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밀어줘서 방송도 타던 사람이 공부한다며 사표내고 훌쩍 떠난게 엊그제 같은데, 금방 포기하고 돌아와 진급을 앞둔 후배 앞에 을로 앉아 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그 자리를 못 견디겠었다.
만들어낸 이 열등감은 결국 한 달 만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했다. 여전히 어디 가서 일자리를 못 구하겠나 싶은 오만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일하던 바닥을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얼어붙은 한국 취업 시장의 험난한 현실을 지독히 맛보게 된다. 수십 통의 이력서를 온갖 정성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다. 그리 욕심을 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던 시간을 한참 겪고 나서야 나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게 된다. 문과 출신인데, 엔지니어 일을 하다 유학을 떠나더니, '중도 포기'해 돌아온 백수. 아무것도 이룬 게 없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게 내 모습이었다. 화려한 과거를 끌고 와 지금을 채우려던 나는, 현재에도 있지 아니하고 과거에도 없는, 교만하고 콧대 높은 실직자였을 뿐이다.
태호 형제, 그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네.... 아마 사망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이 골짜기를 지나면 언젠가 쉴만한 물가로..
그대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 진짜로 여기가 어디냐구요? 여기 수련원 주소라면 경기도 묵안리...
묵안리라는 이름은 누군가가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지명이지요. 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르고 또 천년이 흘러도 이곳이 묵안리라고 불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바뀌지 않는 무언가를 통해서 답하길 원하시나요? 그러면 북위 몇 도, 동경 몇 도쯤..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 '북위'와 '동경'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위치를 설명하는 그 무언가가 없으면, 당신은 없는 겁니까?
네..?
과거에 누군가가 만든 제도와 틀에 기대어 설명하지 말고, 대답해 보세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지금 질문을 던지시는 인도자님 앞에 있습니다.
그럼 내가 가버리면 당신은 없는 겁니까?
아... 음...
다시 묻겠습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과거가 정해 놓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어디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 모르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겁니까?
.......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우리가 사는 건 지금 여기뿐..."
이런 류의 말을 이제 꽤 많은 곳에서 듣는다. 영화에도 나오고 책에도 흔히 인용되는 이 말을 난 20대 후반, 위에 옮겨 놓은 목사님과의 문답을 통해 처음 들었다.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수련회 프로그램에서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던 허망한 내 모습을 처절히 만난 경험이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지금 여기에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거다. 그동안 고개 한번 끄덕이고 쉽게 넘어갔을만한 이 말이, 이날 밤늦도록 이어졌던 문답을 통해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지금'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비로소 안거다.
생각해 보니 '지금 여기' 말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애당초 없다. 과거도 그 당시에는 '지금 여기'였고, 미래의 그 어느 날도 그때가 되면 또 '지금 여기'가 된다. 그 지금 여기가 쌓이고 쌓여 내 삶이 된다면, 내가 누리는 지금 여기를 허망하게 흘려보내는 것 같은 비극이 또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행복해지기. 기쁨으로, 풍요롭게, 살맛 나게 지금을 채워가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 여기의 상황이 살맛 나질 않으니 이를 어찌할까?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어떤 일에는 무기력하고, 때로 상황에 휘둘려 쉽게 지쳐버리는 게 난데, 도대체 어떻게 기쁨으로 지금 여기를 살라는 거지?
"당신은 누구입니까?"
인도자로 부터 다음 질문이 계속된다. 나름대로 답을 해본다.
"... 조태호지요."
"두 딸의 아빠요"
"샐러리맨...."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남편이면서 가장이기도 한.."
그때 마다 질문이 되돌아 온다.
"그게 정말로 당신입니까?"
수십번이 반복되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름, 직위, 관계를 규정하는 호칭 등등)이 다 내 밖에서 내게 부여한 것들이라는 점을 점점 깨닫는 중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진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인 줄 알고 살아온 것들이 사실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주어진 '임시의 나' 들 일 수도 있다는 발견. 이는 내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했다. 임시의 나 중 하나인 '조 과장'이 다른 과장과 비교해서 열등한 마음을 만들었고, 임시의 나 중 하나인 '샐러리맨', '대학원생'이 나로 하여금 타인과 비교하게 했고,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게 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에 의해 내게 입혀진 임시의 껍데기를 '나'로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 속에 있는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나를 규정하려는 내 주변의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안목도 생기고,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
그 내가, 지금 여기 있다.
취업이 안되어 힘들어하고, 좋은 회사를 성급히 나온 것에 후회하던 이 당시 내 모습은 과거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는 있지 않은 '예전의 나'를 찾아 지금 여기로 끌고 온 선택의 결과였다. 모든 것의 해결은, 지금 여기 있는 '진짜 내'가, 과거의 것들과 지금을 연결하는 운전대를 두손에 쥐면서 시작되었다.
잘 나가던 과거가 운전대를 쥐면, 초라한 '지금'이 남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내 운전대를 쥐면,
남은 삶이 온통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할 차례다.
무심코 키를 주어 버린 채 오래도록 나를 운전하게 끔 내버려 둔,
나의 ‘트라우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