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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Feb 13. 2019

이 이야기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1-6. 트라우마

어릴 적 우리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몇 살 때부터를 기억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겐 5~6살로 추정되는 어느 날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 가난한 집들이 대게 그렇듯,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고, 방 입구의 아궁이에 연탄을 피워 추운 겨울을 났었다. 그리고 아궁이 위에는 늘 커다란 솥이 올려져 온종일 끓는 온수를 제공했다.


그날은 아마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던 것 같다. 마당쯤에서 난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방 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아궁이 위 끓는 물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방안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던 내 동생이다.


아이를 들고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사람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다.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며칠 후 누군가 내게 알려 주던 음성이 또렷하다. "니 동생 죽었어"


그다음 이어지는 기억은 부모님이 심하게 싸우시던 모습이다. 어느 날 몹시 슬퍼하시는 아버지에게 내가 다가가 말한다. 아빠 내가 크면 의사가 돼서 동생을 살릴게.


그 뒤 론 한참 동안 기억에 없다가 할머니가 밥을 차려주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주위에 엄마, 아빠가 없다. 할머니가 무서워 엄마 아빠가 어디 갔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밤에 벽을 보고 누워, 할머니 눈치 못 채게 어린아이가 눈물을 흘린다. 베개가 젖은걸 들킬까 봐 뒤집으니 뽀송한 베개 살이 볼에 닿았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다. 나는 이후 내내 할머니 손에 자랐다.


태어나 처음 목격한 죽음은 그래서

엄마, 아빠, 동생..

어린 시절 내 가족을 모두 빼앗아 갔다.




1-6. 트라우마


다리가 부러졌는데 소리를 지르기로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 그 정도로 아프면 그냥 소리를 지른다. 선택의 범주가 아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거실에서 뛰다 넘어지면 일단 주위를 둘러본다. 엄마가 있으면 있는 힘껏 목청을 높이며 울고, 아무도 없으면 탈탈 털고 일어나 다시 신나게 논다. 선택의 범주에 있다. 


우리 삶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놓고 어떤 행동을 할지를 선택하는,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선택을 통찰력을 가지고 요모조모 살펴보는 건 참 중요하다. 운전 중에 누군가 갑자기 위험하게 끼어들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하자.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차가 끼어든 일과 내가 화를 내는 사이에는 '이건 화가 날 상황이야'라며 화를 내기로 선택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저 차 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사건을 놓고 화를 내기로 내 안에서 무언가가 작동한 결과가 내 '화'다. 우리 대부분의 문제는 그러나, 그 선택의 순간을 깊이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서 대게는 로봇처럼 자동으로 화를 낸다. 상황에 나를 온통 내어 놓고 자동으로 슬퍼하고, 자동으로 기뻐하고, 자동으로 괴로워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상황이 되어 버린다. 


내 화가, 내 슬픔이, 결국 내 선택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어떤 일에 대하여 이건 화가 날 일, 이건 슬픈 일이라고 결정짓는 '자동 분류기'가 내 유년기부터 차곡차곡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따귀를 때리는 노숙자에게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온화하게 물어보는 목사님과, 길거리에서 실수로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불같이 짜증을 내는 나의 차이는, 이 자동 분류기를 때려 부수고 '반응의 주인'이 된 사람과, 여전히 자동 분류기의 노예가 되어 주어진 상황에 '로봇'처럼 반응하고 사는 사람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자동분류기는 '고정관념'이라고 말을 바꾸어도 어울린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로봇처럼 반응을 쏟아내는 사람이 안타까운 것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선택'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리가 부러져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 아닌 이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 '선택의 범주'에 하나씩 집어넣을 수 있다. 선택의 범주에 들어온 일들에 이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름표마저 붙여 놓으면, 노숙자의 따귀도, 갑자기 끼어드는 차도, 어깨를 탁 치고 가는 사람도 내가 화내지 않고 지혜롭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지금, 여기의 내가 내 반응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거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로봇처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처한 '나'를 잠시 분리시켜 반응에 대한 선택권을 확보하는 것. 이는 나의 생각과 여기서 이어지는 느낌(화, 슬픔, 괴로움 등)의 사이를 최대한 크게 벌려 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게 닥친 일을 화날 일, 슬픈 일, 괴로운 일등.. '어떤 어떤' 일로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로서 바라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나로 하여금 자동으로 반응케 하는 자동 분류기를 부수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내 선택을 집어넣는 것, 즉 생각에서 느낌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틀어 쥐고 통제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내 반응, 나아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한다.


이는 훈련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다. 내 반응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확고하다면, 오늘의 굳은 결심이 내일의 열심으로, 지금의 다짐이 크고 작은 인내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생각을 전환하는 훈련을 통해 새롭게 결심하고 이를 통해 삶을 이끌어 갈 새로운 힘을 얻는 것, 이는 분명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지혜의 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단 한 번의 훈련과 굳은 결심만으로 완전하게 바꿀 수 있을까? 내 경험상, 어떤 건 그렇게 단순 명료하지 않다.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여겼음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니 여전히 화가 난다. 새로 태어난 줄 알았는데 자꾸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훈련의 여운이 점차 사라지더니 다시 예전의 반응이 나온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이를 극복해 가는 기나긴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의 옛 트라우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어린 시절 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이 아이에게 일어난 일은, 이 세상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두려움을 체험케 했다. 두려움은 어린아이를 웅크리게 만들었고, 작은 일에도 민감히 반응하게 했다. 두려움이 아이의 '자동 분류기'를 더욱 거대하고 은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중이다.  


어떤 건, 너무 단단하고 오래되어서,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영향을 받는다. 특히 충격이나 상처, 어린 시절이나 성장기에 경험한 것들은 나도 모르게 평생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과거의 상처가 평생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사라졌다.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는다는 건, 그 후 비슷한 상황을 피하려는 쪽으로 내 안의 경험치가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유아 시절을 겪었다면, 이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남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는 쪽의 선택을 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모든 게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변명'거리 마저 손에 쥐면, 엇비슷한 상황만 되어도 습관처럼 불안과 초조함을 소환한다. 트라우마가 오랫동안 은밀히 생성해 놓은 이런 자동분류기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보고 배우며 학습한 것들로 인한 자동분류기보다 훨씬 더 단단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적 경험이 자기 방어로 가득한 '이상적 상태'를 만드는 건 더 큰 문제다. 난 이를 '방어적 이상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이야기 속 내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TV에 나오는 나, 모두가 내게 박수를 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려운 시절을 잘 극복하고 살아온 내 삶의 보상으로 여겨진다. 이 상황이 내 안에 은밀히 형성된 '방어적 이상형'을 충족시키고 있는 거다. 날이 갈수록 이 이상적인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과도 같아지더니, 결국은 이 이상형을 잃을까 두려워 준비도 없이 유학을 떠난다.


한국으로 돌아와 의료 기기 영업을 하며 무시를 당하고, 못 먹는 술에 쓰러져 한 겨울 길에서 동사할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그대로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건 삶이 힘들어서 만은 아니다. 그 사는 모습이 내 안에 만들어진 이상형에 너무도 못 미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죽음을 택하면서까지 이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방어적 이상형이 만든 세상은 그래서, '안 그래도 괜찮다'는 틈이 허락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을 은밀히 지배하며 선택권을 빼앗아간다. 

과거는 지나갔는데, 난 여전히 그 과거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는 게 문제다. 지나간 과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건, 그래서 소화기로 불 끄듯 신속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것들을 꾸준히 채워 넣어 쓰디쓴 과거를 희석시키는 것, 과거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을 계속 점검하면서, 내가 만드는 작은 선택들이 낳는 기적과 행복을 체험하는 것, 길고 긴 여정을 끊임없이 걸으며 어느새 새로워진 나를 '천천히' 만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그 가는 길에 스승을 만나기도 하고, 종교나, 좋은 벗, 감동을 주는 책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상황 중에는 유학이라는 상황이 있었다. 그래서 유학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은 과거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어느 평범한 사람의 여정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때 했던 선택에 당신도 공감한 다면, 그 선택을 통해 얻은 것들을 함께 느끼고 당신의 삶으로 가져가 당신의 여정에 쓰길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쪽으로, 긍정적인 쪽으로,

죽을 것 같아도 사는 쪽으로,


아주 조금씩 나의 선택을 이동시켰던 그간의 시간들에 공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당신만의 방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두 눈 질끈 감고 손에 힘을 주어 창문을 닫았다.


사방이 조용해진다.


오른손을 휘휘 내저어 키를 잡아 돌리니 시동이 걸리고 히터에서 바람이 나온다.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그래서 살기로,

거기서 빠져나오기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만든 이때의 선택이

지금부터 쓰는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까지 전달될

행복의 메시지를 만들었다.

우리의 작은 선택이 해 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위대하며,

트라우마와 상처를 잊고 행복한 세상을 찾는

기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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