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면서_01/02
1955년 4월 황해남도 강령군 오봉리. 난 유복자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 때 군인이셨다. 치열했던 전투의 여파로 아버지는 집을 나설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셨다.
산과 들을 내달리던 두 다리는 전쟁을 겪으며 계단 하나도 오르내리기 버겁게 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치안대 사람들에게 빨갱이로 몰리게 되셨다. 기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니 무슨 이유인들 납득이 갔겠는가. 가벼운 욕설로 시작한 것이 구타로 이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더랬다.
전쟁 통에 살아 돌아오셨던 아버지였지만 마을 치안대의 구타에는 살아남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떠나게 될 걸 아셨는지. 어머니에게 무언가라도 남겨주고 싶으셨던 가보다. 그때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남은 어머니 곁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부부금슬이 좋았던 탓이었을까. 어머니는 내 옆에 있기보단 아버지 곁에 계시고 싶으셨나 보다.
어머니께서는 후두염이라는 병으로 자리보전을 잠시 하시곤 곧바로 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그때 내 나이 7살 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이라곤 성씨가 다른 박철남 이라는 오빠 한 명이 전부였다.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큰집에는 이미 5남매가 있었다. 맏딸 박성실, 둘째 박금실, 셋째 박연실 이렇게 딸 세 명이고 아들이 2명인데 맏아들 박광혁, 막내 아들 박광식이라고 한다. 박광식은 나와 동갑이어서 인민학교를 같이 다녔다. 큰어머니는 5남매를 돌보느라 지쳐서인지 내게 큰 신경을 써주지 못하셨다.
아니,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점잖은 표현이라 하겠다. 곤궁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내게는 항상 산에 가서 가족들이 먹을 나물을 뜯어오라 성화셨다.
큰어머니네 가족들이 머무는 아랫목에 불을 지피는 용도였다. 날이 좋지 않아 나물이나 옥수수 뿌리를 해가지 못할 적에는 그 날 식사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제 밥벌이는 제가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랄까.
큰어머니네가 살림이 궁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큰집은 마을 주민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쳐서 돌려받는 일을 했다. 살림이 퍽이나 괜찮았던 큰집 막내아들과 제 밥벌이조차 힘겨웠던 나. 차라리 또래가 없었더라면 덜 서러웠을까.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던 처지는 차림새에도 드러났더랬다.
마치 주인집 아들과 그 집서 더부살이하는 꼬마애 같은 모습이랄까. 인민학교 담임선생님 눈에도 기울어진 형편이 보였나보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나에게는 특히나 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광식이는 도시락도 푸짐하게 담아 가져왔지만 내게는 도시락은 커녕 수업시간에 쓸 학습장과 연필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담임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에게 필수품 몇 가지를 걷어 내게 쥐어주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 그 많은 걸 가지고도 선생님이 날 챙겨주는 게 샘이 났던지 광식이는 선생님이 나를 좀 더 챙겨주는 것 같다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큰어머니에게 고자질 하였다.
“저 간나가 선생님에게 어떻게 말한 줄 아세요? 저 간나 때문에 선생님한테서 욕을 썩어지게 먹었어요!”
광식이가 제 어미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그 다음 벌어지는 상황은 뻔했다. 그 날 밥을 굶는 거였다. 설 명절 같은 행사가 있는 날에는 더 몸을 사려야 했다.
큰어머니는 내가 행여나 제 가족들이 먹을 설 명절 음식을 한 입이라도 먹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명절날 아침이 되자 날 심부름을 보내두고선 아예 집 대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잠긴 문을 멀뚱히 바라보자 허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더부살이란 이런 거였구나…. 그럴 때면 큰 도로 다리 밑 같은 곳에 숨어 명절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리 북한이라도 명절날에는 배를 곪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어느 날, 인민학교에서 단체로 소풍을 간다 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오라셨다.
그러나 집에서 끼니도 거르는 내가 도시락을 싸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큰어머니는 일찌감치 소풍은 꿈도 꾸지 말라 언질을 하셨더랬다. 소풍 이야기에 다들 들떠있을 적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절날에는 몸을 사려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소풍날에는 들떠야 할지 몸을 더 사려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더랬다.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선생님께서 넌지시 말을 건네셨다.
“순실이는 그냥 오려무나.”
기쁘면서 얼떨떨하다는 게 이런 마음인걸까. 소풍을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소풍날이 내게 유일한 기쁜 날, 나만의 명절이 될 것만 같았다.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하는 소망도 생겼다. 선생님께서 챙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도 다른 동무들처럼 즐거워해도 된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소풍날, 소풍가지 말라 일렀던 큰어머니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소풍 장소로 향했다.
정신없이 동무들과 즐겁게 놀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다른 동무들은 점심시간을 즐거워했지만 나는 뒷목이 뻣뻣해져만 갔다. 모두들 즐겁게 도시락을 열어 먹을 준비를 하는 와중, 어떻게 이 자리를 빠져나갈까 하는 궁리를 하였다.
그런 날 뒤로하고 선생님께서 광식이를 불렀다. 광식이는 즐겁다 말고 쭈뼛쭈뼛 어색한 걸음을 하며 선생님께 다가갔더랬다. 선생님께서는 광식이 더러 도시락을 열어보라 하시더니 “순실이 하고 같이 나누어 먹어야지.”라고 하시며 도시락 절반을 덜어 내게 주셨다.
그 때 광식이 표정을 봐야 했더랬다. 덜어지는 광식이의 점심만큼 나는 유일한 내 편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샘솟았다. 그 날 하루는 오로지 날 위한 날인 것만 같았다.
북한에서는 생일이라는 개념이 크게 자리하지 않는다. 만약 그 날을 남한에 온 지금에 비유하자면 마치 생일날 인 것만 같았다. 그 날 점심은 내게는 진수성찬이었으나 광식이에게는 아니었을 게 뻔했다.
잠시나마 즐거웠던 소풍이 끝나고 귀가 시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슬슬 걱정거리가 몰려왔다. 큰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소풍을 다녀왔다는 것이 알려질게 뻔해서다.
역시나 제 밥을 빼 앗겨서였을까? 광식이는 그 날 소풍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어머니에게 달려가 점심 때 일을 일러바쳤다.
“엄마 나 오늘 저 간나 때문에 배고파서 죽을 뻔 했다!”
도시락을 싸줬는데 왜 배고프다 하는 건지 큰어머니는 의아해 하셨다. 그리고 의아해 할만 했다. 광식이는 나더러 들으란 듯이 고래고래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이 저 간나에게 도시락을 절반이나 나눠줬어. 배고파 죽을 뻔 했다.”
그 말을 들은 큰어머니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뒤에 따라올 말은 뻔했다. 온갖 험한 소리와 욕이었다. 익숙했다.
“이 쌍간나 소풍 가지 말라고 했는데 거긴 왜 따라갔니? 왜 따라가서 일을 만드니?”
큰어머니는 이후에도 몇 마디를 더 하셨지만 귀담아 듣진 않았더랬다.
그러고 마지막은 어김없이 저녁을 굶으라는 말로 마무리 되었다. 굶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배가 고프면 정신은 더 맑아지는 법이다.
다른 가족들이 저녁 먹는 냄새가 풍겨왔다. 이 곳, 큰집에서 그들만 입이고, 난 집에서 키우는 가축만도 못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배고픔에 정신은 점점 더 맑아져 오고 잠은 오지 않았다.
그 날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아침, 큰 어머니는 내게 아침을 내어주며 또 다시 엄포를 놓았다. 어제 다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나보다.
“너 이제부터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 절대 따라가지 마라.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집에서 내쫓아낼기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아니?”
어쩌겠는가. 집도 절도 없는 계집아이는 핍박받더라도 버텨야 했다. 그나마 엄포로 끝나서 다행이라 여겼다. 큰집에서 쫓겨나면 꽃제비**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을테니까.
(**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을 이르는 말)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