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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 remember Feb 15. 2023

삶의 굴곡 한가운데.05/06

자라나면서_01

[05. 아이들과의 만남]


비록 거짓 고백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초반에는 행복하기도 했고, 토끼 같은 자식도 많이 낳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렇듯 뒤웅박 신세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자식들은 계속 태어났다. 첫째 딸 명숙이가 태어났을 때 퍽 기뻤다. 드디어 혈육관계인 나를 배반하지 않을 또 다른 존재가 생긴 것이었으니까. 비록 남편은 날 멀리하고 박대하지만 말이다.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남편과 달리 명숙이는 날 박대하지도 멀리하지도 내게 폭력을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나만 바라봐 주었다. 명숙이에 이어 명선이도 태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이 더해져갔다.      


하지만 태어남이 있으면 스러짐도 있다던가. 일찍이 경험한 죽음이 내 자식이라고 피해갈 리 없었다. 명선이가 6개월 즈음 되었을 무렵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좋다는 약을 수소문해 이리저리 써보았다. 하지만 명선이는 도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기는 어려워도 가기는 이리도 쉬운 거였다. 숨이 가뭇가뭇 해지더니 명선이는 제 조부모 곁으로 떠나갔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내게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곧 이어 둘째 명남이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명남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셋째 딸 명희도 태어났다. 이 곳 남한에서야 자식계획을 하니 어쩌니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살았던 북에서는 자식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었다. 이제 키워야할 자식이 여럿이었다. 아프지 않고 자라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나는 못 입고 못 먹어도 딸들만은 귀하게 키우고 싶었다. 없는 형편에 딸들을 곱게 기르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남편은 처음에는 내게만 폭력을 쓰더니 점차 딸들에게까지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본다면 당장에 헤어졌어야 할 테지만, 그 시절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고 사는 것 밖에 몰랐다. 그저 참고 또 참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라건대 자식들에게만은 날 대하듯이 하지 말았으면 했다.      


남편은 세 자식들에게 부모노릇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남편은 언제 한 번 자식들에게 책표지(교과서를 다른 종이로 둘러싸서 튼튼하게 하는 것)를 해준 적도 없고 언제 한 번 공부를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해오라고 하는 꼬마과제(파고철, 헌 옷 등을 바치는 것)나 외화벌이나 학부형 모임에도 참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남편에게는 술이 제일 중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나도, 자식들도. 







[06. 고난의 행군과 남편의 죽음]


그러던 중, 온 땅에 고난의 행군*이 닥쳤다. 모두가 겪는 식량곤란을 나라고 피할 도리는 없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들과 함께 방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없는 형편에 자식 입에 들어갈 쌀을 사는 대신 제 입에 들어갈 술을 샀다. 남편이 이불과 옷을 비롯한 가재도구를 장마당에 내다 팔아서 마지막까지 술을 사댔다. 집에서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자 남편은 빚을 져서 술을 마셔댔다. 그러니 건강이 좋을 리 없었다. 밥 대신 술을 마셔댔던 남편은 얼마 가지 않아 전염병에 걸려 사망되었다. 

    

1996년 8월 8일, 그의 나이 45살, 내 나이 41살 때의 일이다. 남편이 사방팔방에 빚을 져 대었지만 그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유선마을의 사람들은 우리 형편을 알고 있어서인지 관도 짜주고 음식도 보태 와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은 무사히 치렀지만 형편은 더 나빠졌다. 사망한 남편이 우리에게 남긴 건 오로지 산더미 같은 빚뿐이었다. 지붕이랑 벽만 있는 이 집에서 뭘 받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한 것인지 빚쟁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와 빚을 갚으라 성화를 부렸다. 나와 내 자식들은 이미 거지꼴을 하고 이삭이나 주워 먹으며 목숨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더는 이 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토끼 같은 아이들이 굶는 것도 보기 괴로운데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주변에 도와줄 이도 없었다. 고난의 행군은 모두의 코를 석자로 만들었다.      


다들 제 살길을 찾아 헤맸던 시절이다. 그나마 도와줄만한 이는 이미 남편이 빚을 지고 술을 마셔댔었기에 더 도와 달라 할 수 도 없었다. 또 다시 천애고아 7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책임지고 살려야 할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7살 내게는 부모가 없었지만 지금 내 자식들에게는 이 어미가 있는 거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고군분투 하던 와중에 자식들이 차례로 전염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열이 40도를 넘나들었다. 남편이나 명숙이처럼 병으로 사망될까 두려웠다. 막막했다. 명남이는 영양실조가 와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이 명희였기에 명희가 식량 구하는 것을 담당했다. 명희는 처음에는 비바리(밥을 빌어먹고 다님)를 하였다. 그러다 어느 것도 마땅찮은 날이면 명희는 개구리를 잡아와서 영양실조에 빠진 명남이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개구리도 눈에 띄지 않는 날이 오자 명희는 어느 한 집에서 눈만 겨우 뜨고 있는 강아지를 한 마리 몰래 안고 왔더랬다. 그런데 명희가 강아지를 안고 뛸 적 강아지 주인이 그 광경을 몰래 보고 있었나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강아지 주인은 그 자리에서 명희를 잡지 않고 살금살금 뒤따라왔다. 그렇게 강아지 주인이 명희 뒤를 밟아서 보게 된 광경은 일가족이 모두 영양실조로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한 소리 할 요량인 듯 하였으나 이내 한참 생각을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감자 한 광주리와 전통편(아편이 일부 들어간 중국제 약) 신문지만큼 큰 2장을 명희편에 보내주었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감사한 것도 모르나보다. 한숨 돌이킨 지금에서 돌아보자면 지금 나와 내 자식들이 살아있는 것은 모두 그 분 덕이었다. 그 약 덕택에 우리 가족은 목숨 줄을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      


1999년 8월. 자식들의 몸이 회복된 후, 나는 조선 땅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 땅에는 미래가 없었다. 이전과 같은 행운도 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주변을 수소문해 중국을 오간 경험이 있는 자를 찾아 중국으로 갈 방도를 찾았다. 그는 이미 중국으로 가는 방법을 여럿에게 소개를 해준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설명해주었다. 듣자하니 중국으로 가면 떠돌이 생활을 할지언정 굶어죽는 경우는 없다 그랬다. 

    

 하지만 역시 말로만 들은 것이여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중국으로 갔는데 일이 잘못되면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첫째 명숙이(20살), 둘째 명남이(17살)는 북한에 두고 막내 명희(14살)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큰 아이들은 알아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명희는 아직 엄마 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와 막내가 먼저 자리를 잡은 후 명숙이와 명남이를 불러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내 계획을 설명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별 도리가 없다며 내 계획에 수긍해주었다.

  


 *북한이 1990년대 중ㆍ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기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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