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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 remember Jan 31. 2023

삶의 굴곡 한가운데.04

자라나면서_01

[04. 일의 시작과 결혼]


1972년, 18살 무렵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 도자기 공장에 배치되어 일을 시작했다. 이제 구박받는 생활은 지긋지긋했다. 공장에서는 합숙생활을 하기에 집 문제도 식사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도자기 공장에서는 내가 너무 어리다며 본 직장에 배치해주지는 않았다. 낮에는 건설대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공부를 하였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가 ‘가치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내었다. 내 일을 해내고 시간이 남으면 주변 사람들 일도 도와 처리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순실이 말없이 일 잘한다’며 칭찬했다. 

이제껏 처음 들어보는 말들이었다. 이 곳에서는 나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20살이 되어 첫 휴가를 받았다. 주변에서는 저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다 형제를 찾아간다 난리였다. 

그러나 나는 갈 곳이 없더랬다. 오빠네에 가봤자 그 집 수발들라 할 게 뻔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 예전 큰어머니네 집(황해남도 강령군 오봉리)을 찾아갔다. 적어도 그 집으로 가면 지금에 와서야 더 구박할 일은 없을 거였다. 그리고 어찌 사는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구박받던 순실이가 아닌 떳떳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순실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자면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마른 명태와 녹말가루를 사들고  찾아갔다. 6년여 만에 찾아뵙는 것이다 보니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나를 대번에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찾아올 이가 없다는 생각에 한참을 쳐다보더랬다. 그래서 순실이라고, 휴가를 받아 왔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잊지 않고 찾아왔니?”라며 반가워하였다. 

    

그리 구박을 받았더라도 반가워해주는 그들이 살갑게 느껴져서 나도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낳아준 정 보다 길러준 정이 있기에 잊지 않고 찾아왔다.”고 답하였다.


사실 주변 동료 직원들이 휴가를 받아 명태와 녹말가루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 난 돌아갈 곳이 없어 끈 떨어진 연처럼 허전했었다. 오랜만에 그들을 보자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눈물이 흘렀다. 그걸 보고 옆에서 광식이가 한마디 거들었다.“지난 시기가 생각나서 울고 있는가?” 하고 물어왔다.


 반가운 마음이 가득한 와중에 광식이를 보자니 괜스레 밸이 났다. 

“너 몰라서 그렇게 말하니?” 하고 툭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광식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렴, 아무 말 않아야지. 한차례 인사를 마치고, 큰어머니 내외는 이웃에게 국수기계를 빌려다 내가 가져온 녹말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 떳떳해 보이고자 꽤 많은 양을 가지고 왔기에 이웃과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제 나는 더부살이 순실이가 아닌, 나라의 일꾼 순실이었다. 그렇게 7일간 휴가를 즐기다 다시 도자기 공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도자기 공장에서 몇 년간 묵묵히 일을 하다 함경북도 회령 피복공장으로 옮겼다.그 곳에서도 나는 솜씨를 발휘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 ‘김종혁’이라는 사람이 날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종혁은 술수를 부렸다. 

    

공장에는 사로청*위원장이라고 관리자 급의 직책이 있는데 위원장에게 “박순실은 나 김종혁과 연애한지 몇 달 되었고 지금은 임신까지 된 상황이다”라고 거짓 보고를 한 것이다. 얼빠진 사로청위원장은 김종혁의 거짓보고를 그대로 믿었고 나는 몸 바쳐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시절 사람들이 그러했듯 내게는 그와 결혼하는 것 외에 별 방도가 없었다. 그 때에는 이렇게까지 해서 나와 결혼하려 하는 걸 보니 내가 그리도 좋은가보다 하였다. 


그러나 거짓말까지 해서 나와 결혼하려 했던 김종혁의 지극정성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왜인지 본채 만채 푸대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결혼까지 하였는데 벌써부터 찬밥이라니.. 고민을 하고 있자 주변에서 넌지시 알려주었다.      


김종혁이 “아마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여자랑 연애를 하고 있다더라”고 말이다. 시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었기에 시부모님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시부모에게 달려가 따져 물었다. 시부모는 올게 왔다는 듯 당황하지도 않고 사실대로 답을 해주었다. 알고보니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김종혁은 그 여자와 연분이 있었고, 같이 살려 했었는데 시부모님 눈에는 그 여자가 차지 않아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여자를 계속 만나면서 결혼은 나와 한 것이라 한다. 도대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럼 난 뒤웅박 신세가 될 뿐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미 결혼한 처지에 기댈 곳은 남편뿐이었던지라 남편을 잡아보려 애썼지만, 말리려 하면 할수록 남편은 멀어져만 갔다. 쓰지 않던 폭력도 시작만 어려웠을 뿐 점점 심해져갔다. 그래서 그를 다잡으려 노력하는 걸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社會主義愛國靑年同盟)의 줄임말로 북한의 만 14살부터 30살까지 모든 청년 학생이 의무로 가입하도록 되어 있는 최대의 근로단체이자 사회단체)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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