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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Dec 15. 2021

글쓰기 전 네게 건네는 말

 브런치 공모전을 알게 된 건 1년 전쯤이다. ADHD라는 병 이야기에 목말라 여기저기 웹사이트 서치를 하던 중 정지음 작가님의 글을 보게 되었다. 소름 돋을 만큼 유사한 특징에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증상 하나하나 어떻게 해서 극복했는지 위트 있는 문체로 풀어낸 이야기는 모래시계를 뒤엎고 잊어버린 듯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게 했다.


 작가님께서 이야기를 풀어주심에 감사했고 때마침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상황에 감사했다. 남은 기간 동안 무작정 많이 써보자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는 작가님의 말은 인생에 한 번쯤은 내 이야기를 글로 풀어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소원하게 했다.






 2021년은 내가 겪어본 1년 중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난 해다. 건강하던 동생이 쓰러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ADHD만 진단받았던 병은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스펙트럼까지 번졌다. 이전까지 그래 왔듯 무수히 많은 낯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억지로 출근과 퇴근만 반복하는 삶 밖에 몰랐던 나는, 금이 가 무너지기 직전인 유리 바닥 위에 서있는 것처럼 집안을 벗어나는 일이 너무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


 혼자 병을 극복하려 했던 노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고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것들이 내 발밑을 무너뜨리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친구나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보단 속으로 끙끙 앓는 방법밖에 몰랐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옛날 분식집 벽면의 수많은 낙서처럼 떠다니며 정신을 갉아먹었다. 평생 그렇게 살 것이라 여겼고 탈출구는 생각도 못 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계기는 공모전이었다. 수상은 고사하고 목표는 빠짐없이 작성한 완성된 글이었다. 내 인생에 언어 공부든 다이어리 작성이든 그 어떤 일도 3일을 넘겨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30대를 앞둔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면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짐작 가리라 생각한다. 뭐라도 써보자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뭐라도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 생각을 하나 둘 글로 옮겨보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운 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 자리에 앉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책상 앞에 앉는 일, 웹서핑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메모장이든 워드든 한글이든 글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는 일. 클릭 한 번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일이다.


 오늘은 뭘 써야 될까. 메모장을 켜 타이핑을 한다. 몇 분의 고민 시간 동안 단어를 쓰며 유사한 단어들을 긁어모으고 생각한 말들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다음 글이 어떻게 이어져야 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그냥 그대로 적었다.


 깜짝 놀랐다. 죽고 싶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밖에 나오고 싶지 않다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더 놀랐다. 글로 적어두니 빛을 바라본 눈에 남은 잔상처럼 떠오르던 뒤엉킨 생각이 차츰 사라져 갔다. 말 못 하던 생각을 손으로, 눈에 보이는 글로 내뱉으니 상담을 받은 것처럼 생각이 한결 가볍게 정리되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에 항상 적혀있는 글귀 중 뭐든지 글로 써보라는 당부와 권유가 괜히 하는 말이 아님을 또 뒤늦게 깨달아갔다. 한 번 겪은 해방감은 계속 글을 쓸 힘을 실어줬다. 항상 주제가 같더라도 같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보는 글이 아니더라도 계기는 충분했다.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기분은 잔잔한 행복을 안겨줬다.


 지금까지의 습관을 무시하지 못해 3일째가 제일 고비였지만 단어 하나라도 쓰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정말 뭐라도 결과물이 나왔다. 우습게도 생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엮어낸 결과물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완성된다는 결과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흔히들 말하듯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과 하고 나서 하는 후회는 궤가 달랐다. 30년 가까이 되는 날들 중 겨우 10일이었을 뿐이다. 그 짧은 기간은 앞으로 어떻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지 깨닫기엔 충분했다.


 글을 써봤으니 다음 글을 쓸 수 있을 테고, 글을 써봤으니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뭐든지 할 수 있겠구나. 뭐든지 시작해보기 전부터 포기하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출발선에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스스로를 다독일 방법을 알게 된 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가장 믿어주는 사람이 나일 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와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아직 서로 풀어야 할 이야기도 생각도 너무나 많다. 글쓰기 전 네게, 글쓰기 전 내게 다음엔 어떤 글을 써볼까요? 정중하게 물어본 후 나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다보면 글목록에 다시 New가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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