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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Dec 14. 2021

지금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고등학생 시절, 인생계획표를 작성했었다. 현재의 계획뿐 아니라 20대부터 60대까지 무엇을 할 건지 계획하는 과제였다. 그때는 하루 살기 급급해 벌써부터 먼 미래를 계획해야 될까 생각했지만 나는 그 계획표를 작성한 지 10년 다되어가는 시간을 걷고 있다.


 미래가 막연한 20대 초반과 달리 노후준비 계획을 세우는 30대를 앞두고 연금이나 보험 따위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받아본 보험 설계서 내용 중 나이 옆에 사회초년기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설계사님은 고객 특성을 간단하게 나타내는 말이며 나이에 맞추어 단계가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게 듣고 보니 30대가 되면 반드시 그 시기에 맞는 일을 해야 된다고 못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10대 시절 부모님께서 공부는 해야 될 시기가 있다며 그렇게 얘기하던 그 '시기'가 무엇인지, 보험 내용을 설명해주는 설계사님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습관처럼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반은 억지로 만들었던 계획표도 그랬다. 30대가 되면 다들 결혼을 하니 결혼을 할 테고, 40대가 되면 다들 자녀를 양육하고 있을 테니 자녀를 키우고 있을 테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막상 30대를 앞둔 나는 부모가 되기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자유롭지 못했고 흔히들 한다는 적금이나 청약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회가 들이미는 나이대에 걸맞은 '시기'는 내게 해당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ADHD, 양극성 정동장애, 조현병 스펙트럼. 병의 앎도 치료도 늦게 시작한 나로선 모두가 치고 나간 구간을 뒤늦게 밟아가는 것도 벅찼다. 공부와 경제상식은 물론이고, 사람과 관계에서 당연시 여기는 예의도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야 출발선에 섰지만 시기를 운운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 정말로 필요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기력의 잔량을 바닥까지 긁어 먼 곳에 뛰어가는 사람들을 종종걸음으로 쫒다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이렇게 태어난 자신을 탓했다. 앎이 늦은 자신을 탓해버렸다. 우울감은 늪처럼 깊고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할 방공호처럼 안락했다. 이전에도 그랬듯 버거운 현실을 외면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퇴근하면 14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면 다시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되던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펜을 들었다. 손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하루하루 목표치를 늘리며 억지로 억지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더 이상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하는데 왜 나아지지 않을까. 스친 생각은 물이 스며드는 스펀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을 가져왔다. 문득 내게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언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면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 믿었던 생각의 시작점이 어딘지 되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같이. 기준부터 틀렸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두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어느 정도인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언어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언어를 선택했고, 남들이 다 보는 책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랐다. 누구는 하루에 책 몇 권을 읽는다는 글을 읽고 따라 하려 했다면 내가 읽을 수 있을 만큼 읽고 억지로 권수를 늘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생활이 차츰 즐거워졌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은 적당한 스트레스와 의욕을 가져다주고 이전에 기력을 박박 긁어가며 노력했을 때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사회가 정해준 시기보다 나를 기준으로 만든 시기를 따라가다 보니 삶의 질 향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언젠가는 결혼도, 내 집 마련을 위해 단계를 밟는 것도 하겠지만 남들과 동일한 시기에 하지 않아도 됨을 알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다이어트도 감량기보다 유지기가 더 힘들고 어렵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미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뒤늦게 깨달은 나는 오늘도 평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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