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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Oct 19. 2021

어쩔 수 없지, 뭐.

 도움을 요청한 분들은 새 자취방에 이삿짐을 옮겨준 업체 분들이었다. 두 분은 부부셨고, 항상 같이 일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내 문자를 받자마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그냥 스쳐지날 고객 중 한 명인 내 자취방으로 와 손도 대지 못한 쓰레기들과 버리는 박스를 다 치워주시고, 주문해놓고 조립하지도 못한 책상과 책장, 티비장을 조립해주셨다.


 한 분께서 가구를 조립하시는 동안 한 분은 나를 데리고 나와 늦은 저녁을 사주셨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어머니를 잃은 이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그래도 산 사람은 살 길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셨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그 어느 것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어머니가 아프셨던 것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도, 장례절차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쩔쩔매기나 하고, 새롭게 시작해보자던 기껏 깨끗하게 청소까지 해놓은 자취방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전부 내 잘 못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신경 썼으면 애초에 그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가제를 버리지 못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 못을 물으면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용의자도 피고인도 나뿐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늦은 저녁 어느 일식집 구석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죄를 묻는 것도 나였고 죄를 인정하는 것도 나였고, 가중처벌을 하는 것도 나였다. 모두 내가 나에게 했다. 그러니 죄가 없다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이도 나 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본 '인생을 살며 가장 도움이 되는 말' 중 하나가 떠올라 따라 해 보았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따라 마시던 장국이 다소 짭짤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보니 하얀 가구들이 원하던 위치에 맞게 예쁘게 진열되어있었다. 퀭한 눈에 잠깐 생기가 돌았다. 마음에 드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마음에 든다고 답했다. 가구뿐 아니라 스탠드 조명, 커튼, 캣타워 같은 물품들도 하나하나 다 조립하고 설치해주셨다. 혼자였다면, 한 달이 지나도 다 못 했을 일들이었다.


 쓰레기나 종이박스는 전부 버려줄 테니 걱정 말고 다음에 또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꼭 불러달라며 손을 잡아주시던 온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못 하는 집주인을 뒤로 한채 박스 더미를 갖고 두 분은 이삿짐을 옮기던 그날처럼 예쁘게 잘 살라는 인사를 두 번째로 해주셨다. 






 아직은 어수선했지만 조금씩 정리가 되자 한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고르고 골라 산 분홍색 TV장은 다리가 흰색에 금색으로 포인트 덧칠이 되어 있어 더욱 예뻐 보였고 그 옆으로 하얀색 책상은 역시 고심해서 고른 만큼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분홍색 TV장 위로 클래식 TV를 장식하면 더욱 예쁠 것 같았다. 여태 모든 일의 안 좋은 방향으로 흙 밑 뿌리처럼 번지던 생각이 지면에 꽃들을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하듯 해가 비치는 곳으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곁을 떠나셨지만 계속 슬퍼할 수는 없었고, 만약에라도 정말 천국이 있어 나를 보고 계시다면 당신이 생각하시기에 내 딸도 열심히 살았구나, 하며 웃음 짓게 해 드려야 했다. 아니, 해드리고 싶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깨끗한 방이었다.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깨끗하고 취향 섞여있는 내가 원하는 방. 늦은 시간이었지만 몸을 일으켜 박스 부스러기들을 정돈하고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물건들을 한쪽으로 정돈했다. 며칠을 씻지 않은 몸을 충분히 시간을 들여 박박 씻고 나오니 숨통이 트이다 못해 살 것 같았다. 몸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던 저녁 약을 천천히 삼켰다. 


 멍하니 매트리스에 앉아있는 건 어제와 똑같아도 마음가짐은 달랐다. 나는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받은 휴가가 끝나 내일부터 출근을 해야 했고, 홈 스타일링을 부탁한 업체에서 시안이 왔고, 얼른 집을 정리해 이전 집에 머물고 있는 나의 고양이를 데리고 와야 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생각하기 시작하자 가지런히 나열되듯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큰 창문 밖에 야경을 바라보며 내일 환하게 들어올 해를 생각해봤고, 앞으로 바뀌어갈 내 방의 모습을 기대했다.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 차분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고 잠이 청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며칠 만에 밖을 나가려고 하니 불안감부터 밀려왔지만 그나마 제일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심호흡을 한다. 간단하게 집안 정리를 한 뒤 이어폰을 찾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신발끈이 풀리지 않도록 쟁여매고 천천히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아침 일찍 맞이하는 공기가 시원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길에 스며들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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