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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Oct 18. 2021

분홍색 가구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았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수와 신입 같은 관계로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병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룸메와 자취를 시작해 부딪히는 일이 적어지자 끓어서 넘치던 애증이 조금씩 식어가는 듯했지만 만날 때마다, 어쩌다 연락이 될 때마다 병에 대해 의지와 노력을 탓하는 말들이 겨우 봉합해놓은 상처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곤 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어머니는 신앙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짐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가장 이해해주길 바라는 부모가 타인의 시선에서 남의 일 대하듯 툭툭 내던지는 말은, 나를 지옥 같은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부모는 하나뿐이라 그저 고분고분하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옳은 일이라 믿었다. 


 역병이 한참 돌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걱정되는 말 한마디라도 보내면 감기처럼 지나갈 병을 크게 부풀려 걱정을 끼치고 있다며 타박을 하곤 했다. 당뇨와 고혈압도 있으시니 몸조심하시라고, 꼭 백신도 맞으시라고 얘기했지만 듣지 않아 주셨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분홍색 가구가 새 자취방으로 배송되던 날, 결국 어머니는, 역병으로 돌아가셨다.







 서른도 안 되어 상주가 된 나는 처음으로 겪는 모든 일이 공포스럽고 어쩔 줄을 몰랐다. 장례식을 진행하고 삼일장을 할 것인지, 화장 후 어디로 모실 것인지, 삼일장 내내 조문객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성분이 다른 슬라임들을 하나로 뭉쳐놓은 것처럼 걸쭉해진 뇌로 어느 것 하나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든 장례절차를 치러야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몇 안 되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문의 전화가 다 나에게 왔다. 전화통화가 10분이 넘어가면 소곤소곤 거리는 환청 때문에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도 계속해서 통화를 해야 했다. 매 순간마다 남은 자아를 박박 긁어 어떻게 해서든 날을 꾸려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에 겹쳐 장례를 진행하는 내내 내 시간 하나, 내 공간 하나 없는 시간은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끼게 했다. 


 룸메인 친구도, 몇 안 되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도 와서 위로해주었다. 어머니의 지인분들은 너무나 좋은 분이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냐고 한탄하시며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만날 때마다 매번 질책과 타박을 받았던 나는, 나에게만 그런 말을 하셨던 걸까 아니면 이것도 의지와 노력이 부족해 생긴 병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흐느끼지도 않는 울음을 쏟으며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으로 어머니 대신 나를 타박하며 매일매일 곤죽이 되어갔다.


 새로 이사 간 집에 들를 시간도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미리 주문한 책상과 여러 물품이 와도 집 안에 쌓아두기만 할 뿐 배치하거나 꾸밀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갈아입을 옷과 물품을 챙기기 위해 잠시 이사 온 자취방에 들렀을 때 여전히 쌓여있는 짐들과 쓰레기들을 보며 내 집이라고 생각했던 이 방마저 깨끗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너무나 우울해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씻지도 못 하고 내 공간에서 나를 채우지도 못하니 단 4일 만에 내 컨디션과 마음은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 환청이 시끄러워 정신없이 칼을 귀에 들이댄 적도 있었다. 


 그래도, 버텨냈다. 남은 자아를 박박 긁어모아 소비했고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치러냈다. 체력의 출발선이 여타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낮은 내가 홀로 힘들어하는 동안 어머니의 지인들이 생각지도 못 하게 나와 내 동생들을 많이 도와주셨다. 친척들만 찾아올 줄 알았던 조문객은 생각보다 배는 많이 찾아왔고, 어머니의 지인분은 어머니께선 이렇게나 성공한 인생을 살다 가신 거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성공한 인생... 솔직히 어머니께선 그리 성공한 인생을 살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해준다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역병으로 여러 가지 제한이 걸린 와중에도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잠드셨다. 맨 앞자리에서 바로 어머니를 마주 보고 있던 나는 입 밖으로 단 한마디도 해드리지 못했다. 조용하게 속으로 안녕히 가세요. 한 마디 드렸을 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장례절차는 밤을 새우며 정리한 덕에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참 병을 앓다가 치료를 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병 때문에 생긴 일들에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치료를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상황을 타개할 힘조차 없는 나는 짐이 잔뜩 쌓여 어지럽혀있는 자취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절망으로 저며 들었다. 


 박스는 이곳저곳에 어지럽혀있고 무얼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한참 방을 꾸밀 생각에 미리 주문해둔 분홍색의 티비장 하나 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아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 몇 시간을 조용히 울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됐는데 너는 이런 색의 가구 살 생각이나 하고 있었냐고 어머니가 바로 옆에서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모친상으로 얻었던 휴가의 마지막 날까지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매트리스 위에 누워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생각에 경청하느라 시간을 쏟았다. 


 휴가의 마지막 날 저녁이 다되어가던 시간대였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청할 방법을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물색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더 뒤에야 이전에 이삿짐 옮기는 걸 도와주던 업체의 상담사 분이 떠올랐다. 어떤 것이라도 괜찮으니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전화해달라고 말해주셨던 분이다. 도저히 전화를 못하겠어서 떨리는 손끝으로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도와주세요. 하고.


 몇 분 후 바로 전화가 왔다. 오늘 일이 끝나면 오후 늦게라도 갈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지체 없이 바로 답변해준 분께 나는 감사합니다, 하는 짧은 답 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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