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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Oct 17. 2021

전야

 이사 갈 집과 날짜가 정해지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을 3D 도면으로 펼쳐놓고 가구 배치를 해보는 것이었다. 오늘의 집이라는 애플리케이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내 방의 3D 도면을 만들고 그 판매하는 가구를 배치해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 


 일하던 경험을 살려 건축물대장을 떼고 방의 면적과 실측에 가까운 길이를 알아와 3D 도면에 적용시킨 후 이리저리 만져가며 방을 꾸며보았다. 낮은 침대를 둬보기도 하고, 커다란 책장을 아예 벽면 하나를 차지하도록 해보기도 했다. 소풍이나 여행도 그 전날 밤이 제일 설레고 행복하다고 하지 않던가.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방 꾸미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너무 재밌고 행복했다. 내 방이 될 생각에 가구 하나 침대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기 위해 리뷰도 꼼꼼히 찾아보며 꼭 사야 할 가구와 사고 싶은 가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도면은 이러했다. 보일러실이 면적과 딱 맞는 침대를 배치하고 그 앞에 컴퓨터 책상과 TV를 배치하려 했다. 나의 귀여운 고양이를 위해 캣타워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해가 잘 드는 곳을 생각하면 책상을 이곳에 두는 건 무리였다. 주변 물건들이 햇빛에 닿아 바래질 터였고 전자기기들도 햇빛에 살균되듯 뜨뜻해질 것을 생각하니 다른 배치로 해야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에게 권유하다시피 물음을 던졌다.



 두 번째 도면은 이렇게 해봤다. 벙커침대 밑에 책상을 두고 뒤로는 작은 소파를, 그리고 앞 면엔 TV와 주변엔 책장을 두는 걸로 말이다. 룸메랑 같이 살면서 2층 침대에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고 좁은 원룸에서 공간 활용하기엔 벙커침대만 한 게 없었다.


 무엇보다 나의 고양이가 이전 자취방에서도 벙커침대를 아주 좋아했기에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벙커침대 덕에 공간 활용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책상이 아래 공간에 들어가 있는 비슷한 인테리어들을 찾아보니 답답해 보이기도 했고 의자에 앉고 설 때 뒤에 소파가 걸리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여전히 햇빛에 노출되는 책장은 빛바램을 유의해야 되는 부분이기도 했고 말이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으로 배치를 생각했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고르기도 쉽지 않아 홀로 끙끙 앓아대다가 혼자 앓기보단 도움을 청해보자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앱인 숨고에 홈 스타일링으로 견적서를 제출해보았다. 다행히도 많은 전문가 분께서 답변을 주셨다.


 팔랑귀는 그중 제일 친절하게 답변이 온 업체를 선택했다. 도면과 실측 내용을 전달해드리고 어느 디자인인 집을 원하는지 그동안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쌓아놨던 인테리어 사진들을 모조리 보내드렸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꿈만 꾸던 흰색+핑크+회색 톤으로 된 방 꾸미기를 시작한 기분이어서 가슴이 콩콩 뛰어대었다. 겉으로는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분홍색이었다. 그 오묘하고 보기만 해도 마냥 예쁘기만 한 분홍색으로 방을 꾸미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게 이루어지기 직전이라니, 로또 당첨용지를 들고 농협 본사로 찾아가고 있는 당첨자의 심정이 이러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델링과 공간에 맞는 배치를 정리하기까지 며칠 소요된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을 잔뜩 표현한 이모티콘으로 답을 한 후 오늘의 집, 원룸 꾸미기, 집 꾸미기 등 인테리어에 관련된 어플이란 어플을 죄다 뒤지며 분홍색으로 된 가구나 생활용품 등은 닥치는 대로 북마크를 해두었다.


 전부 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 된 것처럼 행복감에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오질 않았다. 그런 설렘으로 이사 전까지 당분간의 지옥 같은 출퇴근도 조금은 수월하게 버텨낼 수 있었다.






 항상 그렇듯 이삿날 아침 일찍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스케줄이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면 사람이 없는 시간부터 움직여야 되었기에 출근할 때도 안 일어났던 시간대에 일어나 이사 준비를 했다. 짐은 이전 자취방에 다 싸놓은 상태였고 나는 당일 계약서 작성과 중고거래를 위해 이사할 집 근처에서 숙박하고 있었다.


 갑자기 중고거래라니, 그 바쁜 날 뭘 거래할 작정인지 물어보신다면 바로 클래식 TV이다. 하얀 레트로풍 감성 디자인에 채널 돌리는 버튼이 있는 그 TV!! 이사 날이 잡히고부터 인테리어 구상에 온 힘을 쏟던 중 이 TV가 화룡정점임을 알게 되어 당장 당근 마켓에서 구매해 거래 예약을 잡아둔 상태였다.


 이사할 방엔 입주청소를 불러둔 상태였고 나는 나대로 후에 짐을 들고 와 정리를 하면 되는 상태였다. 입주청소를 직접 할 수도 있었지만 싱크대 배수구나 화장실, 보일러실의 배수구는 도저히 손댈 자신이 없어서 돈이 들더라도 최대한 깨끗하게 유지하고파 입주 청소를 부탁한 것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차가 많이 다니는 곳에서 커다란 TV를 거래할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기분이다. 부부로 보이시는 두 분께서 자동차로 TV를 가져오셨고 연신 혼자 들고 가실 수 있으세요?? 물어보셨지만 나는 물론이죠! 하며 하이톤으로 답을 하곤 했다.


 금액 송금까지 완료하고 나서 TV를 품 안으로 들자마자 살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TV가 너무 무거웠다. 지하철은 고사하고 택시로도 운반하기 힘든걸 혼자 들고 가겠다고 했다니 이전까지의 자신이 바보스럽고 한심해 갑자기 너무나 우울해지려는 걸 어떻게든 마음을 다 잡고 택시를 불러 탔다.


 택시를 타자마자 몰래 콧노래를 부를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이지, 나도 나를 알다가도 모르겠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것을.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 나도 좋았고, 슬프면 나도 슬펐다. 그러니 지금은 행복했다. 내가 행복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입주청소가 이루어지고 있는 방에서 전문가분들께 인사하고 TV를 가져다 놓았다. 여섯 명이나 되는 분들이 8평 원룸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청소 업체는 배수구 청소나 유리 청소, 창틀 청소 등 하는 곳마다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비포 애프터를 확실하게 보여주셨고 청소는 신경 쓰지 말고 맡겨달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영업용 멘트에 감동받아 사진과 영상을 전송받는 내내 너무나 감사하다고 답변을 드리곤 했다. 물론 다 끝난 후 잔금 지급도 잊지 않았다.






 드디어 이벤트의 하이라이트인 이삿짐 옮기기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미리 와 계신 이사업체 분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얼른 올라가 나의 고양이부터 나오지 않도록 안전하게 숨겨놓았다.


 미리 짐을 싸 둔 파란색 박스를 다 옮겨주시고 우려했던 추가 짐 옮기기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며 안전하게 다 비닐 포장 후 옮겨주시곤 했다. 바구니에 전부 비닐을 싸고, 움직이지 않도록 한 번 더 싸고, 비가 오니 그 위에 한 번 더 싸주기까지 하시며 꼼꼼하게 챙겨주셨다.


 자꾸 추가금이 걱정된다는 얘기를 해서 그런지 이 정도는 추가금이 들지도 않는다며 다독여주셨고 가전제품들도 깨지거나 상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포장해주셨다.


 제일 문제는 2층 침대 해체쇼를 부탁드렸었는데, 같이 온 나의 아버지와 빠르게 착착 해체해가는 모습을 보며 역시 이런 건 프로한테 맡겨야 된다고 새삼스러운 생각을 입술로 내뱉곤 했다. 그럼 혼자 옮길 생각이었냐며 말을 걸어온 분은 아마도 상담을 해주셨던 여성분이신 것 같았다.


 아버지 못지않게 힘이 장사여서 침대도 쉬이 들고 나르셨던 분은 이름을 불러주시며 너무 걱정이 많다고, 고용주 입장에서 왜 이렇게 걱정이 많냐며 어깨를 도담 여주 셨다. 같은 일이 반복돼서 일어날까 봐, 아니면 뭔가가 잘 못 될까 봐 계속 걱정하던 모습이 눈에 띄게 보였던 모양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너무 걱정하는 것도 걱정이라며 허탈하게 웃는 모습에 같이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태풍경보가 울린 지역이었지만 이삿짐을 옮길 때까지 그렇게 비가 많이 오지 않았고 어찌어찌 궂은 날씨를 뚫고 새로운 자취방에 짐을 다 옮길 수 있었다. 


 집이 정리될 때까지 나의 고양이는 룸메가 맡아주기고 했다. 고양이 물품도 미리 챙겨두었고 새로운 캣타워도 배송되면 조립해둬야 했기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짐 정리는 본인이 더 잘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남은 잔금을 치르고 하루 종일 도와주신 두 분을 배웅할 수 있었다. 녹초가 된 채 겨우겨우 몸을 씻었고, 아직 침대를 사지도 않은 터라 얇은 매트리스 하나만 깐 채 쓰던 베개와 이불을 뒤덮고 잠을 청했다. 깨끗해진 방을 둘러보지도 못 하고 짐 정리도 못 한채 그렇게 자취방에서 하룻밤이 지나갔다.






아침부터 해가 팍 들어오는 방은 눈 뜨는 기분도 달랐다. 누가 핸드폰 플래시를 눈앞에 켜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알람으로 자연스럽게 깨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걸어서 8분 거리이기에 일찍 일어난 아침은 그만큼 여유로웠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심호흡을 하며 문 밖을 나섰다. 


 아직 시간이 남아 귀에 이어폰을 꼽고 평소보다는 음량을 조금 더 낮춘 채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지하철 같이 막힌 공간이 아닌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칠 때엔 조금 더 여유롭게 지나칠 수 있었다. 


 조금은 상쾌한 기분으로 반쯤 더 걷고 있을 때였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랫동안 연락한 적이 없던 터라 조금 놀란 심정으로 전화를 받으며 웬일로 네가 먼저 전화를 했냐고 물었을 때, 동생이 차분한 말투로 답을 해왔다.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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