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계약은 두 번째지만 이전 집은 룸메가 세대주였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직접 계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막도장 하나 없어 멍한 상태로 도장을 하나 만들러 왔다. 갈색 막도장 말고도 예쁜 색의 아크릴 도장이라던지, 마음을 뒤흔드는 예쁜 색들이 많았다.
이 몰골로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을 선택하면 여기 있는 사장님과 직원들이 타박하진 않을까 실없는 생각에 20분을 쏟고 있었다. 뒤에서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는 듯한 직원이 다가와 어느 게 마음에 드세요? 그렇게 물어보셨다. 마음에 드는 것... 실용성을 제쳐두고 마음에 드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하자 솔직하게 옅은 분홍빛에 큐빅이 박혀있는 도장으로 골랐다.
직원분은 예쁜 걸 고르셨다며 도장도 예쁘게 파드리겠다며 프로그램을 다루기 시작하셨다. 마음에 드는 것... 다름 사람 시선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내 시선으로 마음에 드는 도장이 점점 완성되어가자 부끄럽지도 않고 창피하지도 않았다. 마냥 도장이 완성되기까지 설레기만 했다. 분홍색 아크릴 인감도장이 완성되자 직원 모두 도장이 아주 예쁘게 잘 되었다고 한 마디씩 하고 가셨다. 스스로 보기에도 예쁜 도장이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예쁜 도장을 막 써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뒤늦게 보이기 부끄러워하며 내민 도장으로 부동산 계약서가 차곡차곡 채워졌다. 내 예쁜 도장은 부동산중개소 안에서도 여러 번 칭찬받았다.
계약금을 제외하고 남은 보증금을 송금하고 나니, 모든 게 열 발자국 느린 나는 그제야 코 꿰었다는 말을 훅 떠올렸다.
직장과 가까운 곳
상사가 골라준 방
상사가 소개해준 부동산
상사가 깎아준 월세
상사의 집과 거리도 가까움
…….
……….
원체도 신분이 노비였다만 더 떨어지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됐지만 설렘이 불안감보다 컸기에 일단은 한편으로 미뤄두었다. 이젠 정말로 하게 되었다. 이사!
전 세입자가 나가는 날짜가 정해지고 내 이사날짜도 잡혔다. 8월 23일. 그전까지 룸메와 내 짐을 분리하고 가져가야 될 이삿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제일 문제는 그나마 깨끗한 방에 안착한 2층 침대였다.
아버지가 목수 셔서, 주문제작 후 가져가지 않는 원목 2층 침대를 내게 준 것인데 내가 나가면 룸메는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딱 내 앉은키만큼만 윗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룸메는, 나보다 20cm나 크다. 결국 침대는 해체쇼를 하기로 했다.
이곳에 이사와 많은 물건을 산덕에 홀로 나가는데도 짐이 제법 많았다. 이삿짐 박스를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하고 짐을 싸기 시작하니 안 그래도 좁은 집이 이사 박스로 그득그득 해졌다. 일부러 눈에 띄지 말라고 낮은 톤인 파란색으로 시켰는데 문 열면 마주치고 눈 돌리면 마주치는 게 이사 박스였다.
옷 같은 것들은 대강 넣어도 최악이 구겨지는 것이지만 전자기기 같은 경우는 깨졌다간 월세의 5배는 깨질 테니 무서워서 건들지도 못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박스 개수가 많아지자 소중한 전자기기는 한 곳에 잘 모셔두고 부랴부랴 핸드폰 어플을 켰다. 이전에 어플로 이사업체를 불러본 경험이 있어 같은 어플로 쓰려고 했더니 렉이 엄청나다.
나는 프로그램이 버벅대는걸 어느 것보다 싫어한다.
그래서 빠르게 다른 어플을 뒤져보았다. 다른 일로도 유용하게 쓰고 있던 어플에서 견적을 받기로 했다. 여러 가지 카테고리 중 이사 카테고리도 있기에 당장 견적서를 올렸고 밤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여러 곳에서 답변이 왔다. 업무시간 외에 그 어떤 일로도 전화 통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문자로 답변을 해주는 업체에게만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한 곳에서 자세한 내용의 답변이 왔다. 원래 이사날짜가 쉬는 날이었는데 그래도 연락 주셨으니 답변을 보내주신다는 내용이었다. 10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화통화 연결을 하자 여자분께서 상냥한 목소리로 받아주셨다. 보통은 전화 상담도 남자분께서 하시는데 여자분께서 받아주시니 어쩐지 한결 마음이 놓여 어디서 어디로 이사를 갈 것인지, 짐은 어느 정도인지, 특이사항은 무엇인지 얘기를 하다 보니 바로 업체를 결정해버렸다. 내 귀는 어느 것보다도 잘 휘날리는 팔랑귀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특이하게 이사 업체는 견적서를 자필로 작성해 사진 찍어서 보내주시고 유리로 된 짐이나 식기처럼 깨지기 쉬운 짐에 대해선 알아서 포장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해주셨다. 이전에도 반포장 이사를 했다 모든 포장에 추가금을 받아 겁부터 집어먹어 그렇게 되면 추가금이 얼마나 나올지 여쭤보니 그 정도로는 추가금이 안 나오니 거어억정 마시라고 몇 번이나 도담아 주셨다.
의심이 가시질 않았지만 이미 계약서까지 받은 터였고, 꼼꼼하게 살펴봐주시는 섬세함 덕에 벽 틈새가 갈라지듯 경계심이 허물어지며 업체에 온전히 짐을 맡길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더 의심하는 건 나만 더 감정을 소비하는 마이너스 밖에 안 되는 행동이 아닌가.
어른들이 이사할 땐 손 없는 날을 받아서 이사를 한다고 하지만, 그 대단한 손 없는 날은 이사비용이 배로 불기 때문에 아픈 자취생은 그냥 세입자가 나가는 다음날로 홀랑 잡아버렸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사 당일 태풍이 불었다.
어쩌다 보니 추적하게 비가 오는 날, 이사를 시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