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일간의 기록
삿포로를 여행했던 이야기하기 전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늘 첫사랑의 모습을 입에 달고 살았다. 긴 생머리에 쌍꺼풀이 없는 눈, 흰 피부를 가지고 있고 나보다 약간 작은, 그리고 책을 좋아할 그 사람을 늘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사람도 두 번째 만난 사람도 그것과 비슷했다. 어딘가 맘이 맞지 않아 결국 헤어졌지만 두 사람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내게 있었다.
삿포로를 상상해보면 지평선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빼곡한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나오는 시퍼런 호수가 떠오른다.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 속에 자라는 라벤더 향이 끝도 없이 온몸을 채우고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라벤더가 들어간 맥주를 한 모금씩 머금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들은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 냉정과 열정 같은 극단의 경계를 파고드는 일처럼 은밀했다. 이전에 첫사랑의 모습을 그려놨던 것처럼 나는 삿포로를 혼자 상상하고 있었다.
비록 눈이 쨍하도록 밝은 햇빛이 라벤더 향을 돋우는 7월도, 눈으로 가득 뒤덮인 오도리 공원을 걸으며 홋카이도 우유가 가득 담긴 라떼를 머금을 수 있는 2월도 아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할 도시라고 생각해버린 이상 앞으로 몇 번이고 더 와야 할 곳이었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4월에 떠나기로 했다. 눈이 서서히 그치면서 비로 바뀌기 시작하는 4월, 따뜻한 국물을 마시기엔 적당한 날이겠거니 했다.
옷을 샀다. 그리고 머리를 했다. 식단을 조절했고 몸 컨디션을 챙겼다. 첫 만남은 가장 괜찮은 모습으로 가고 싶었다. 막상 가서 실망하게 되더라도 나와 그곳 사이에 이 정도의 긴장은 필요했다. 만남이 떨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떨린다는 건 동시에 설레는 일이었다.
삿포로역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적당히 내리는 비와 쌀쌀한 기온으로도 충분히 삿포로인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나는 이런 느낌을 기대했다. 날씨 탓인지 허기졌다. 간단한 짐만 챙겨 소바집으로 갔다. 일본에 오면 꼭 한 끼 이상 소바를 먹게 된다. 그때마다 여자친구는 자루소바, 나는 온소바.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건 다르지 않았다. 그게 참 좋았다. 뜨끈한 국물에 계란구이, 생맥주 한 잔은 완벽했다. 비가 오는 날이라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열도 적당히 식으니까 부담이 없었다.
오도리 공원을 걷다 보니 야경 보러 갈 시간이 됐다. 노면 전차, 셔틀버스를 타고 모이와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찬 공기가 케이블카 안에서도 느껴졌다. 어둑해지는 하늘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산 위는 그대로 얼어버린 눈들이 쌓여 있었고 입김이 나왔다. 난 언젠가 '입김을 보는 건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것'이라고 시를 쓴 적 있었다.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다. 손이 저리고 얼굴이 당겼다. 근육이 수축하는 게 느껴지고 발이 간지러워질 무렵 산을 내려왔다. 하늘이 보라색에서 남색, 검은색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점점 밝아지는 불빛들은 하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했다. 나는 수많은 별이 펼쳐진 우주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4월에도 삿포로는 쌀쌀하다. 저녁은 더 그랬다. 몸을 데울 필요가 있었다. 양파를 볶고 갖은 향신료를 더해 향을 끌어올리고 육수를 넉넉하게 붓는다. 재료를 가득 넣고 뭉근하게 끓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가장 맛있는 방법으로 튀기고 굽고 볶아낸다. 호로록 떠먹기 좋을 정도의 카레에 큼직한 고기, 홋카이도산 아스파라거스, 버섯, 옥수수, 연근 등이 올라가면 비로소 삿포로의 스프커리가 된다. 채소가 달다는 느낌이 참 오랜만이었다.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삿포로 여행기는 3부작으로 구성됩니다. 다만 사진 옮기는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 해결되는 대로 2부가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