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이 오타루, 오겡끼데스까
영화 <러브레터>를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러브레터>의 배경 오타루, 삿포로 주변엔 많은 도시가 있지만 이곳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삿포로의 싸늘한 날씨와 가장 닮아 있는 도시 오타루, 눈이 채 녹지 않은 4월에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보통 민낯이라고 하면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원래의 모습 정도로 쓰이기 때문에 내가 첫사랑이라고 표현한 삿포로에 맞는 표현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나에게 민낯은 순수한 상태 그대로의 것, 가장 원초적인 형태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맨얼굴을 처음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던 웃음의 의미가 담긴 단어기도 하다. '삿포로의 민낯'이라는 말에는 그런 것들에서 파생된 여러 생각이 담겨 있다. 자기가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 장소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지 않은 더 많은 것들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등 일본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내가 문득 생각한 게 있다면 그때 그 장소에서 시티팝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80년대 버블 경제, 일본의 평화롭고 모던한 감성이 담겨 있는 시티팝은 듣는 것만으로도 경쾌하고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게 만든다. 시티팝을 듣고 싶은 몇몇 장소를 꼽자면 오사카의 난바, 고베의 기타노 이진칸, 후쿠오카의 하카타역, 그리고 지금 갈 홋카이도의 오타루다.
같은 곡이 잘 어울릴 거다.
삿포로역에서 오타루 역까지는 가깝다. 기차 타고 가는 길에 집에서 떠올려 봤던 오타루의 모습을 되짚어봤다. 유리 공예와 오르골, 르타오와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모델이 있다는 곳이었다. 작고 낡은 표지판이 안내하는 오타루 역, 선로에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는 차단막도 없는 그곳에 내렸다. 분명 나는 이런 걸 바랐다. 혹시나 바닥이 주름져 갈라진대도 화장기 없는 이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밤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오르골당에서 보내는 것도 꽤 괜찮다. 나는 외할아버지 집에서 오르골을 처음 봤다. 태엽을 드륵드륵 안 감기는 데까지 감고 손을 탁 놓는다. 틱틱거리면서 한 음 한 음 노래가 완성될 때 나는 무슨 곡인지도 모르면서 단절된 음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에 빠져 있었다. 오르골당에 들어가면 우선 개수에 압도된다. 어릴 때 봤던 나무 오르골이 초라해질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한 오르골들을 듣다 보면 여행 내내 흥얼거리게 되는 곡도 하나쯤은 만나게 될 거다.
오르골당을 나오면 바로 옆에 르타오가 있다. 삿포로는 좋은 유제품을 생산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 유제품을 사용한 프로마쥬 치즈 케익은 비싸긴 해도 여유로운 오후를 가득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리 내려놔 적당한 온도로 식은 커피와 진한 치즈케익을 먹으면서 4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았다. 한숨 자더라도 아무도 깨우지 않을 것만 같았다.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 사람은 설탕과 지방이 필요한가 보다. 나와서도 춥지 않았다. 길을 쭉 걸었다. 유리 공예품을 파는 가게, 삿포로 특산물 옥수수와 멜론을 파는 가게, 여러 해산물과 가공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모든 길은 운하로 통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어두워지고 운하가 밝기 시작했다.
오타루의 거리는 낮과 밤 모두 매력적이지만 오타루 운하는 꼭 저녁에 가길 바란다. 탁한 물빛이 까만 거울로 변하면서 운하를 따라 서 있는 가로등이며 주변의 건물들이 반사된다. 마치 행성을 박아 놓은 듯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착각마저 든다. 운이 좋다면 근처 밤거리를 걷다가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상점을 볼 수도 있다. 빨갛게 녹은 유리를 길게 늘이고 줄이면서 만들어내는 유리 공예품은 밤과 대비돼 마치 태양을 녹여놓은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더 돋보여 유리창 너머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낮과 밤이 공존했다.
쌀쌀한 밤이 늦으면서 커다란 부루마블처럼 우리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운하에서 오타루 역, 오타루 역에서 삿포로역, 삿포로역에서 가까운 나의 숙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펼쳐졌던 오타루의 기억은 지금은 꽤나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하다. 곧 다시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의 첫사랑, 삿포로의 민낯 #1 https://brunch.co.kr/@tjsanf1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