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삿포로의 민낯

#3 여행과 일상, 숙소 앞 라멘집

by 쇼코는 왜

삿포로 여행기라고 시작했던 게 드디어 마지막 날까지 왔다. 화려한 스스키노의 밤이나 삿포로에서 유일한 사케 양조장, 치토세츠루에서 먹었던 술지게미 아이스크림을 이야기해 삿포로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겠지만 이번엔 여행에서의 일상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상은 가장 익숙하게 스며있는 것, 보통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떠나는 거지만 여행 다시 새로운 일상이 되는 순간은 여행을 떠날 때만큼이나 새롭다. 3박 4일 동안 삿포로에 있으면서 여기서 살고 싶다 생각했던 때가 있다. 오타루에서 본 환상적인 운하, 오도리 공원을 장승처럼 지키고 서있는 TV탑,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올라가 보는 도시의 불빛 때문이 아니다. 단지 숙소 앞에 있던 라멘집 하나 때문이다.


내 숙소는 삿포로역에서 3분 거리에 있었다. 단출하지만 조식도 나왔다. 나의 기상 시간은 매번 조식 시간에 맞춰져 있었는데 아침 7시 반 정도에 뜬 눈으로 일어나 모자를 챙겼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슬렁슬렁 조식 먹는 곳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서 거기서 1분 앞에 있는 라멘집으로 몸을 숨겼다. 4월의 삿포로 바람을 반바지와 슬리퍼로 견디는 건 분명 무모했지만 매번 그렇게 나갔다. 조식은 라멘을 먹고 와서 먹었다.


라멘집 사장님

가운데를 주방 공간으로 사용하고 그 주변을 손님들이 둘러앉는 테이블 구석에 앉아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곳과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심야식당' 같았다. 다만 이른 아침에 먹는 라멘이 어색해서 꼭 심야식당의 마지막 손님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은 역이 근처에 있어서 외국인을 많이 봤을 법 한데 신기한 듯 주문을 받았다. 익숙한 것에 대한 반가움인지선 것에 대한 새로움인지 모르겠으나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설명해주려 무던히 애썼다.


나는 들리는 단어 몇 개를 가지고 문장을 이해해가며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건너편에선 한 가족이 같이 라멘을 먹고 있었다. 낯설고 또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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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집의 구글 이미지로 주문을 했었다. 오른쪽은 라멘집의 교자

팬에 야채를 볶고 육수를 붓는다. 육수가 끓어오르는 동안 차슈를 썰고 끓어오른 육수에 쯔유를 살짝 넣는다. 야채가 완전히 익기 전 면을 가볍게 삶아 그릇에 담아내고 야채가 담긴 육수를 부어낸 후 파, 차슈 등을 올려낸다. 가쓰오부시를 간장에 절인 걸로 속을 채운 오니기리(주먹밥)도 너무 늦지 않게 내 테이블에 올라왔다.


가족 손님이 나가고 주인의 관심은 온통 내게 있었다. 내가 위에 올라간 재료에 대해 궁금해한다 싶으면 어김없이 일본어가 들렸다. 네기(파)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스프링 어니언(파)라고 말해주기고 하고 가쓰오(가다랑어)를 튜나(참치)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나의 여행 이야기, 나이, 국적 등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들을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언어를 쓰는 누군가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기 속에 내가 뱉은 호흡들이 듣는 사람의 귀에서, 머리에서, 온몸에서 반응하는 걸 보는 과정이 새삼 신기하고 자랑스러워서 나는 자꾸만 단어를 뱉고 억양, 속도, 발음, 성조 따위를 신경 쓰며 상대방을 나름 배려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내가 모르는 단어들을 다시 하나하나 짚어주며 소리 내어 읽을 때, 그게 사실 내가 알고 있던 단어였단 게 밝혀지면 글자들은 꽃망울 터지듯 내 입을 넘어 손으로 머리로 옮겨가는 과정을 겪었다.

20180405_085813.jpg 타베로그로 추천 받은 꼬치구이 맛집

누군가의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기 위해선 반드시 낯섦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새 그 과정이 지나간 후 이틀 째 그곳을 찾았을 땐 주인이 자주 가는 맛집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날이 마지막 날만 아니었다면 꼭 그곳들을 가봤겠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삿포로에 올 핑계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


그리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날 삿포로 공항엔 눈이 내렸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도 눈이 내렸다. 덕분에 삿포로에 계속 있는 것만 같은 꿈에 빠지곤 했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려 할 무렵 넘어온 내 진짜 일상이 오히려 낯설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여행에서 일상을 발견하는 건 참 신기한 경험입니다.


어느 나라의 문화, 습관, 가치관들이 조금이나마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은 여행 이후에도 계속 생각날 거예요. 4월에 가고 11월에 정리한 삿포로 여행기, 보다 좋은 곳들이나 맛있는 음식들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었지만 여행엔 이런 경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삿포로 여행기가 제 글 중에 제일 사랑받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신기하네요. 모두 감사합니다.


나의 첫사랑, 삿포로의 민낯 #1 https://brunch.co.kr/@tjsanf115/13

나의 첫사랑, 삿포로의 민낯 #2https://brunch.co.kr/@tjsanf1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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