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상상은 우주로 향한다
#1 나의 상상은 우주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빨강머리 상담소의 앤이에요. 매일 한 명의 손님만 상담하고 있어요. 오늘은 어떤 손님이 올지 너무 궁금해요. 저는 항상 오늘 올 손님을 상상해요. 직장에서 상처 입고 마음 터놓을 곳을 찾아온다든지 가까운 누군가와 너무 크게 틀어져버린 뒤 돌이킬 수 없어 울기 위해 오는 분도 있어요. 오늘은 어떤 분이 오실지 상상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당신을 위해 차를 준비해야겠어요. 오늘같이 추운 날엔 레몬 살짝 띄운 홍차가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어서 오세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요? 몇 가지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 그게 좋겠네요. 예전에 상담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분은 공장에서 발을 헛디디고 뒤로 넘어져 시력을 잃은 분이었어요. 저에게 눈이 안 보이는 게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저는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넘어 다른 감각을 사용해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어요.
밖에 나가기로 했어요. 물론 그분은 안 나가려 했죠. 그래서 손을 꼭 잡고 제가 평소에 자주 산책하는 곳으로 데려갔어요. 계절마다 꽃이 바뀌며 피는 아름다운 곳이에요. 날만 좋다면 이 세상이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곳이에요. 가을 날씨는 충분히 서늘했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이따금 있었고 길 옆으로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코스모스가 여러 다발로 피어있었어요.
"이 꽃에선 어떤 향기가 나요?
코스모스요.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제가 먼저 해볼게요. 저는 따뜻한 냄새가 느껴져요. 어느 겨울, 눈을 잔뜩 맞고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 열을 잔뜩 올려놓은 장판에 이불을 깔고 그 안에 들어가 이불 냄새와 샤워한 후 살 냄새가 섞인 냄새를 맡는다면 분명 이런 향일 거예요. 상상이 가세요?
하... 볼 수도 없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죠? 무슨 아로마테라피 비슷한 건가요?"
분명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어요. 처음 마주하는 것에 대해선 누구나 경계심을 갖기 마련이잖아요? 그걸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제 역할이겠죠. 저는 두 손 가득 코스모스를 내밀며 말했어요.
"세상은 의미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눈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로 바깥의 모든 것에 반응하고 감동해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자극을 스스로 외면하는 건 모든 걸 포기해 버리는 것과 같아요.
눈이 안 보이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아세요? 누가 나를 보고 있다 해도 나는 그걸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거울 앞에 선다 해도 내가 나를 본다고 확신할 수 없어요. 그게 날 미치게 하는 거예요.
혹시 눈을 계속 일부러 뜨려고 하는 걸 알고 계세요?
아뇨. 난 그런 적 없어요. 아마 그랬다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랬나 보죠. 그 있잖아요. 뭐라 하더라. 어쨌든 그거요.
보통 그걸 습관이라고 하죠. 어때요? 눈을 감으면 무서우신가요?
그런 거 아닙니다.
눈을 감아보세요. 제가 손을 꼭 잡아드릴게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보고 있다고 말도 해드릴게요. 눈이 안 보이는 것과 눈을 감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에요. 다시 한번 꽃을 만져보고 맡아보세요.
후, 그래요. 미안해요. 향이 좋네요. 어릴 때 많이 맡았던 향이에요. 지금은 학교가 토요일에 다 쉬지만 예전엔 학교를 갔었어요. 그 대신 학교가 조금 일찍 끝났었는데 남는 오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근처에 있던 메타세콰이어길을 친구들과 걸었죠. 메타세콰이어길 옆으로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색깔별로 피었어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그곳을 걸으면 코스모스 향이 내 앞에 펼쳐진 꿈처럼 달콤하게 다가왔어요. 지금은 못 보겠지만.
가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잘하고 있어요. 아주 좋아요. 조금 빠르게 움직일까요? 아직 우린 가야 할 곳이 많아요. 오늘 하루가 너무 짧을 지경이에요."
아 참, 제가 왜 상담사가 되기로 했는지 이야기했던가요? 저와 당신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경험 속에서 상처 받고 위로받아요. 참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서로가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죠? 난 이 신비한 우주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상담사가 된 거예요. 지금 저와 이야기하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나요?
차를 타고 가면서도 온통 관심은 그분에게 가 있었어요. 정지선에 설 때마다 지나치게 몸을 움츠리는 것, 코너를 돌 때면 손잡이를 찾아 허둥대는 손, 그러면서도 습관처럼 앞을 보려고 눈을 치켜뜨는 모습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도 벌써 절반은 성공했어요! 하지만 표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걸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미 그 과정을 밟아온 분들의 자취를 보여주기 위해 전시회에 데려갔어요.
그냥 단순한 전시는 아니고 선천적 시각장애인 분들과 후천적 시각장애인 분들이 글로 어떤 모습을 표현하면 미술을 전공한 학생들이 그림으로 다시 옮긴 결과물을 담아낸 전시예요. 일반인들도 편견 없이 상상할 수 있게 글만 전시돼 있고 그림은 휴대폰을 통해 따로 보게 돼 있었어요.
"제가 글을 읽으면 천천히 상상해보는 거예요. '차갑게 얼굴을 때리다 이내 사라졌다. 얼굴을 만져보니 내 몸에서 나왔는지 밖에서 왔는지 모를 조그만 것이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푹푹 연신 내 발목을 잡아대는 것들과 몸을 부대끼다 보면 어느샌가 내 몸은 그것들을 닮아 식어간다. 몇몇 아이들이 만들어 낸 동그랗고 차가운 눈덩이를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은 사실 모두 그렇게 생겼을까 싶다가도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몸을 녹이면 어쩐지 그 생각들이 실없어지는 것이다. 벌써 사람들이 겨울이라 부르는 것이 왔나 보다.'
제목이 혹시 '눈(snow)'인가요?
아까워요. '눈(snow)의 감각'이었어요. 어때요? 눈의 여러 모습이 상상되나요?
네. 저도 눈을 참 좋아했어요. 어릴 때면 근처 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썰매도 타고 천사도 만들고 눈사람도 작지만 만들었어요. 이건 꽤 재밌네요. 다른 작품들도 듣고 싶어요. 조금만 더 천천히 말해주세요.
'통유리로 된 창 안에 들이친 햇볕이 따뜻하다. 손을 조금만 옮기면 느껴지는 온도 차이로 알 게 되는 그것을 누군가는 볼 수 있는 걸까. 내 앞은 항상 밤, 따뜻한 밤과 차가운 밤 사이에서 시간을 몸으로 느낀다. 열린 창으로 느껴지는 달빛에도 온도가 있다고 말하면 누군가가 와서 내 손을 데워줄 것만 같다.'
왜 상상을 할 때면 눈을 감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전혀 무섭지 않아요. 눈을 감고 손을 만져봤어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보니 꽤나 차갑더군요. 바깥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나 봐요. '시간의 온도'라고 제목 붙이고 싶네요.
맞았어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시간의 온도'라는 작품이에요. 혹시 직접 쓰신 건 아니죠?
정말요? 정말 맞았어요? 어떻게 맞췄는지 나도 신기하네요. 마치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누군가와 같은 경험을 상상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 고마워요. 앤.
천만에요. 이제 사무실로 갈까요? 오늘 같은 날엔 레몬 살짝 띄운 홍차가 잘 어울릴 거예요."
저희 상담소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주택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주택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야 해요. '어디까지 들어가야 돼?'라는 생각이 들 때쯤 조그만 문이 하나 나올 거예요. 초록색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문이 우리 상담소의 상징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아, 키가 크다면 머리를 조심하세요. 문이 낮아서 부딪칠 수도 있어요. 통유리로 들이치는 햇볕이 들어오는 당신을 맞아줄 거예요.
지금 당신이 앉아있는 바로 그곳에 그분이 앉았어요. 짙은 녹색 천으로 감싸진 소파 위로 앉아 들이치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눈이 부신 듯 지그시 감고 있었죠. 미처 찻잔과 주전자를 씻어 놓지 않아서 후다닥 하다 보니 잔을 하나 깨 먹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홍차 우러나는 향 사이로 레몬의 톡 쏘는 냄새가 섞여 있고 저절로 잠이 올 것만 같았어요.
"눈을 감고 있으니까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내가 왜 보는 것에 집착하는 걸까 생각을 해봤어요. 나는 여태 앞만 보고 달렸어요. 남들이 알만한 대학 나와서 현장부터 밟고 올라서겠다고 일을 시작했죠. 당장 보이는 생활이 달라지는 것에 만족했어요. 그런 상황에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내 미래가 부정당하는 것과 똑같았어요. 눈 감는 게 무섭냐고 물어봤을 때 인정하면 내가 나를 더 싫어하게 될까 화가 났어요. 사실 무서웠거든요.
아직도 무서워요. 누구라도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가끔 보이는 게 보이지 않는 것보다 무서울 때가 있잖아요. 나는 이제 지금 마시고 있는 홍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요. 평소 같은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는데 문득 따뜻해진 날씨에 몸이 더워져서 겉옷을 다시 집에 넣고 길을 나서는 거예요. 그렇게 늘 걷던 길을 걸어가는데 못 보던 꽃망울이 한껏 터져있을 때 향을 맡는다면 이런 느낌 아닐까요? 어때요? 제법 잘했나요?
네! 그럼요. 이젠 저보다도 잘하시네요. 상담사로 직업을 바꾸셔도 괜찮겠어요."
그분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걱정되진 않아요. 언제라도 다시 눈 감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요. 어때요. 제 이야기가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나요?
#2
가끔은 출장도 가고 있어요. 당신이 이야기하기 편한 장소가 있다면 말해주세요. 저도 자주 가는 카페가 하나 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옛날 노래가 흘러나오고 매일 정원에서 가져온 꽃을 손질해 테이블마다 꽂아놓는 곳이에요. 직접 자수 뜬 컵받침 위 방금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적당한 산미가 입에 퍼지면서 기분이 절로 좋아져요. 오늘 당신은 어디 있나요?
이번 주엔 출장을 다녀왔어요. 꽤나 길게 다녀왔지만 덕분에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생겼어요.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작가 지망생이라고 소개하면서 직접 오기가 힘드니까 와줄 수 있냐는 말을 꺼내더라고요. 제가 누구예요. 상담이 필요하면 어디든 가잖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여행도 할 겸 제주도로 떠났어요. 제주도에선 우리들을 육지 사람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육지와 떨어져 있어 생긴 독특한 문화와 음식들이 저의 상담에 새로운 영감을 줄 것만 같아서 종일 들떠 있었어요.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근처에서 스쿠터를 빌려 당근이 유명한 구좌읍까지 쭉 달렸어요. 해안도로를 따라 쭉 가면 수시로 변하는 바다를 볼 수 있어요. 뒤로는 풍력발전기가 점점 멀어지고 앞으로는 미역 말리는 냄새가 앞서 있는데 곳곳에 보이는 까만 돌들과 꽤나 잘 어울려서 세상 어느 곳도 아닌 제주도란 걸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런 기분을 만끽할 무렵 도착했어요. 작가 지망생의 집에.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바로 상담을 시작하고 싶어요. 상담 전에 보여드려야 할 것도 많고요. 제주도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오는 내내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우리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네. 제가 너무 앞서갔네요. 앉아 계시면 제가 쓴 글을 가져올게요. 읽어 보셔야 상담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방안은 강박이 있는 것처럼 잘 정리돼 있었어요. 책상다리가 바닥에 그어진 선에 맞춰져 있고 의자 사이 간격도 일정했어요. 살짝 열린 서랍장으로 보이는 식재료들까지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진열돼 있었어요. 집안을 살짝 둘러보고 있을 때쯤 그분이 원고지를 잔뜩 안고 왔어요.
"선생님, 이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써왔던 원고들이에요. 출판사에 보냈던 것들은 원고가 안 돌아와서 없지만 제가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골라왔어요. 상담하시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제가 옆에 있으면 부담되실 거 같으니까 잠깐 차 좀 내올게요.
좋은 생각이에요. 다 읽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네요. 그럼 오늘은 한 편만 읽고 상담을 하도록 할게요. 며칠 머물 계획이니까 천천히 읽어가면 될 것 같아요. '玄武岩(현무암)과 海女(해녀)'를 읽어볼게요.
역시 선생님. 탁월한 선택이에요.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아세요? 현무암이랑 해녀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잖아요? 제가 제주도에 살게 된 이후에 까만 해녀복을 입고 있는 해녀들을 자주 봤는데 그게 꼭 현무암의 검은색과 같아 보이는 거예요. 이 두 개를 엮어서 제주도의 역사를 해녀 중심으로 기록하는 소설을 쓰면 좋겠다 생각해서 쓴 거예요. 아이고, 방해 안 하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서 읽어보세요."
그 소설 사실 읽을 수가 없었어요. 한자가 너무 많아서 한 줄 이상 읽을 수가 없었거든요. 읽을 수 있는 한자만 찾아서 그 구절들을 읽는 걸로 어느 정도 내용은 예상이 갔지만 너무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해서 애 좀 먹었죠.
"저 사실 한자를 잘 몰라서요. 읽기가 꽤 어렵네요. 괜찮다면 오늘은 상담을 먼저 하고 내일 다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 그러시죠. 사실 그 원고가 제 고민이에요. 매번 공모전, 신춘문예, 출판사에 글을 써서 내고 있는데 한 번도 연락이 안 왔어요. 점점 자신감도 떨어지고 이젠 포기할까 하다 선생님을 부르게 된 겁니다.
(계속)
글: 이지혁
그림: 강동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