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았던 나의 아버지

#1 나무는 속으로 웅크린다

by 쇼코는 왜

※직접 쓴 수필입니다.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아버지가 간이식 수술을 하게 됐다.


오래전부터 술을 많이 마셔온 아버지는 내가 입대하기 한 달 전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모든 걸 포기해버릴 고목처럼 아버지는 누워버렸다. 그런 아버지를 가족들에게 떠넘기듯 나는 입대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나는 얼른 군대에 가고 싶었다. 집안의 모든 걱정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인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볼 수가 없었다. 누나와 여동생, 둘은 아버지 옆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도망치듯 들어온 훈련소에서 안심하고 있었다. 한 평 남짓 허락된 병실, 그와 비슷한 훈련소 침상에서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5주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훈련소를 마치기 전, 누나가 보낸 편지에 ‘아빠가 수료식 간대.’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직접 운전할 수가 없어 삼촌들이 운전해서 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료식 당일, 연병장에서 곁눈질만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수료식이 다 끝나고 삼촌의 손에 이끌려 간 주차장 한쪽에서 아버지는 나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던 고목 한 그루가 이제는 병든 장미처럼 초라하게 서 있었다. 새까매진 피부, 급격하게 빠진 살 때문에 파인 주름, 복수로 차오른 배는 마치 교과서에서 배웠던 미래의 인류가 퇴화한 모습 같았다. 처음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해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멋쩍게 뒤돌아 차로 들어갔다. 나는 삼촌에게 소대장이 새벽 6시에 왔다던 부모님이 아버지인 걸 전해 들었다.


차를 타고 다른 훈련병들이 오지 않는 외곽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그새 눈물이 많이 늘어있었다. 수료식 때부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마른 눈물이 보이곤 했다. 훈련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오랫동안 잡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나는 이식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비가 온 뒤라 날이 쌀쌀했다.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연락이 왔다.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대의 배려로 나는 6박 7일 청원 휴가를 나갔다. 입대 후 처음으로 병원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고집을 부려 얻어냈다는 창가 자리에서 아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아프기 전엔 ‘아프면 그냥 치료하지 않고 가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더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순간 아버지가 다시 한 그루 나무처럼 보였다. 더는 고목이 아니었다. 환절기에 잎을 다 떨어트리고 온몸으로 광합성 하는 나무 같았다. 아버지는 분명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더 나은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직 검사를 마치고 다시 부대로 돌아갔다. 그사이 걱정 섞인 말들이 많이 오갔다. 조직 검사 적합 판정을 받고 수술 날짜를 받았을 때 비로소 상황이 실감 났다. 수술 3일 전 병원으로 내려가 아버지 병실 보조 침대에서 잠자면서 그저 모든 게 잘 끝나기만 빌었다. 그날은 난생처음 아버지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보다 작아 보였다.


수술 당일, 아침 늦게 일어나 계속 오늘을 실감 했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던 천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복 때문인지 속이 메스꺼웠다. 지나쳐가는 많은 조명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먼저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를 했다. 눈을 감고 열을 세기 전 잠들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수술이 끝난 후 친척과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기절했고, 다음 날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음 날부터 명치에서 배꼽 아래, 거기서 오른쪽으로 배 절반을 그어낸 상처가 아려왔다. 아픈 걸 참지 못할 땐 약을 맞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어떨 땐 아픈 걸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싶었다. 다만 혼자 몸을 일으키지 못해서, 보조기구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살아 있었다. 병동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시간이 지나 보조기구 없이 걷게 됐을 때, 한 직원은 나에게 이제 많이 괜찮아졌냐고 묻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신생아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히 수술 후 10일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았다. 다만 공복에 찬물을 들이킬 때면 내 장기가 훤히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수술은 잘 끝났다. 아버지와 나는 퇴원 이후 후유증도 거부반응도 없었다. 아버지는 밥을 더 잘 드시게 됐고, 나는 살이 조금 빠졌을 뿐이었다. 퇴원 후 아버지는 ‘이제 간은 20대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의 너스레처럼 당신 몸에 내 일부가 접붙이 됐다. 나는 옹이처럼 태어난 내 몸이 아버지의 새순을 무사히 돋아내길 바랐다. 수술이 끝나고 퇴원할 무렵, 벌써 밖에선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무는 추운 겨울을 버티면서 안으로 더 단단해진다는 말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지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오랫동안 바랐던 농사도 지으시고 누구보다 건강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농장의 귀여운 웰시코기덕에 자식들이 근처에 없어도 외로움이 덜 하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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