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제나 푸르지는 않은 밤

<순이 삼촌>, 그날의 기록과 지금

by 쇼코는 왜

이번 여름 제주도를 다녀왔다.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제주도가 내 기억에 전부인지라 인터넷에 즐비한 맛집들과 명소들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스쿠터로 해안도로를 달렸던 것도 언젠가 들었던 친구의 낭만론 때문이었던 걸 보면 내가 제주도를 찾은 게 아니라 주변인들이 나를 제주도로 등 떠민 것 같다.


병과점 '미남미녀', '폴레폴레 게스트하우스'

3일 동안 제주도에서 300km 남짓 달렸던 도로 중 절반 이상은 함덕, 세화, 구좌를 포함하는 동부 지역였다. 소설을 읽고 난 후에야 알았지만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내가 '제주 4.3 사건'을 처음 알았던 건 고등학생 때였다. 수학여행 코스에 들어가 있던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그 사건의 진상을 봤건만 으레 단체 관광이 그렇듯 쉽게 잊혔다. 그러다 다시금 뉴스에 '제주 4.3 사건' 관련 소식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도 몇 년 전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갖지 못한 나름의 핑계를 대보자면 '제주 4.3 사건'과 비슷한 부류의 '5.18 민주화운동'이 너무 강렬했다. 내용의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으나 광주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도 심심찮게 볼 수 있기에 나는 고등학생 때 본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기억할 수 없었다.


바틀샵 '기영상회', 카페 '앤트러사이트'


보통 말보단 글이 더 기억에 남고 글보단 영상이 더 기억에 남곤 한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은 남아 있는 영상이 많이 한정돼 있기에 말과 글, 그중 소설 <순이 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순이 삼촌>에서 말은 목적이고 글은 수단이다. 제주도민들, 그리고 본인이 겪었을 경험(말)들을 글로 각색해 풀어냈을 뿐이다. 다만 중요한 점은 단순히 이 소설이 '제주 4.3 사건' 당시만을 묘사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제주 4.3 사건'은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말 못 할 아픔과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도민들의 이야기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소설의 현재 시점도 사건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때으로 설정이 돼 있는 것이다. 서울에 살던 내가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8년 만에 제주도에 내려가서 순이 삼촌이 죽었음을 알게 되고 죽은 순이 삼촌을 통해 '제주 4.3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맞물린 가족들의 이해관계와 대응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트라우마와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트라우마는 순이 삼촌에게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구 하나 상처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은 대화를 나누며 사건에 대해 금세 분노했다가 사그라들었다가 인정했다가 체념하곤 한다. 오랜 관성처럼 퍼져있는 사건에 대한 무기력증이 그들을 결국 체념하게 하는 데에는 분명 70, 80년대까지 이어진 군사정권의 탄압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제주 4.3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현재에 와서 바라보면 그들은 폭도도 반동분자도 아닌 그냥 도민, 같은 사람이었음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밀려드는 바다 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날씨, 섬 전체에 퍼져있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그때도 똑같았을지는 알 수 없다.
답다니탑망대 옆 망루등대

소설 곳곳엔 사투리 및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 및 해석이 포함돼 있어 가독성은 좋으면서도 제주도 특유의 분위기는 잃지 않아 꽤나 좋았다. 예를 들어 내가 제주도에 가서 직접 봤던 '코지'나 '불턱'에 대한 설명이나 육지에서 흔히 남자를 지칭하는 '삼촌'이란 단어가 왜 여자인 순이 삼촌에게 쓰였는지 등에 대한 것 등이다.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겠지만 그것들이 소설을 수필처럼 만들고 보다 많은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한다.


<순이 삼촌>이 소설이라는 점은 이 글의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감정적이고 격정적일 수 있는 대목들, 묘사들을 충분히 감정 이입하게 하면서도 독자를 관찰자의 위치에 머물게 한다. 거기서 독자는 다양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가능하고 사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경험담 수준의 수필 <순이 삼촌> 일 때와 소설 <순이 삼촌>의 큰 차이는 여기서 나타난다.


여기서 독자가 관찰자의 위치로 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시점이다. <순이 삼촌>에서는 두 가지 시점이 존재한다. 과거 시점은 '제주 4.3 사건' 당시고 현재 시점은 위에서 밝혔듯이 30여 년이 지난 때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둘이 단절되지 않음을 나타내고 독자들이 있는 현재, '제주 4.3 사건'이 밖으로 드러난 시점에서 그 두 시점을 평가하게 한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 집단의 내부에서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른 척해야 했던 사건에 대해 이제야 내릴 수 있는 평가는 그들은 살고 싶었고 사건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그날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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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막식당' 고기국수, '우도이야기' 해물라면, 다금바리와 고등어회

이번 여름 다녀온 제주도는 평화로웠다. 스쿠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면 앞으론 미역 말리는 냄새가 풍기고 뒤로는 풍력발전기가 멀어졌다. 직접 기르고 바로 잡아 올린 재료로 만든 음식들은 간만 맞춰 내도 충분히 맛있었고 여러 지방 사람이 다녀가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어떤 아주머니의 말은 정겨웠다. 새벽에 해가 뜨는 걸 보려고 숙소 앞바다에 나가면 텁텁한 여름 새벽 공기가 짠기를 가득 머금어 폐를 가득 채웠는데 쌀쌀하지도 그렇다고 덥지도 않은 날씨가 지금 와서야 그리워진다.


별방진, 불턱, 코지, 현무암, 보말, 돌담, 바람 등 제주에서 봤던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본다. 30년 전, 그보다 더 30년 전에도 이런 풍경이었을까. 이런 풍경이었다면 내가 밟고 있는 거무튀튀한 밭들 속에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누군가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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