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에 나타난 파란 은유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의도적으로 모든 곳에 도저한 파란색은 이미 그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님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감독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 속에서 파란색을 포함한 일련의 요소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재구성된 현실을 어색하지 않게, 관용될 수 있는 인식 범위 내에서 전달하기 위해 <문라이트>는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재구성된 현실은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이때 실존하는 현실에 있는 문제, 상황들은 재구성된 현실 속 문제, 상황들과 대응된다. 그것은 단순히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색채, 사물, 시선에 담긴 상징과 연관되어 관객 각자의 초월적 판단을 요구하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재구성된 현실의 상징을 분석할 때 실존하는 현실의 여러 가치판단이 개입된다. 그 가치판단은 대부분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차용하게 된다. 이때 가치와 재구성된 현실의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 관객은 실존하는 현실의 가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다. <문라이트>에서 이러한 요소의 중심에는 ‘파란색’이 있고 파란색의 이미지를 가진 ‘바다’에 담긴 ‘평등’이란 가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한다.
<문라이트>에서 샤이론은 각 장마다 그에 걸맞은 이름을 갖는다.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이름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지만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성장 없는 성장담’이라 표현할 수 있는 3개의 독립된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이 모두 다른 상황과 마주하면서 독립된 주체성을 표현하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이름에 따라 인물이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게 나타나는데 거기서 ‘바다’라는 장소는 3개의 장을 잇는 중요한 공간의 역할을 한다. 3개의 장에선 바다가 한 번씩 등장하게 되는데 ‘바다’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각각의 인물이 정체성을 나타내고 실현하는 데에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블랙
‘바다’와 ‘평등’의 가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기 위해선 영화를 역순으로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문라이트>는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라는 문장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대사에도 사용되는데 그 장소가 샤이론이 ‘리틀’일 때 후안과 함께 갔던 바다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샤이론의 삶에서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들은 대부분 ‘리틀’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이후의 사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 정도의 일들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인 리틀의 시기에는 그것들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자세히 알기 힘들기에 역순으로 사건을 보게 되면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블랙’의 시작은 그의 대부인 ‘후안’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한 블랙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마이애미에서 살고 있는 블랙은 감옥에서 만난 마약 거래상과의 인연으로 마약 거래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근육질의 몸과 거친 말투, 금속 치아 등의 모습에서 예전의 마르고 왜소한 블랙을 찾기란 힘들다.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남성, 그것의 외양적인 모습을 떠올린다면 바로 ‘블랙’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샤이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주체되기에 실패한 샤이론은 내면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본인의 정체성을 찾을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블랙에게 첫 경험을 하게 해준 친구 ‘케빈’의 전화가 그것이다.
케빈의 전화를 받은 블랙은 그날 저녁 몽정을 하게 된다. 성적 욕망의 표출, 사회적 젠더 개념의 고정된 폭력으로 인해 억눌려 있던 주체성을 밖으로 표출(사정)한 블랙은 케빈을 찾아간다. 이때 블랙에게 사용된 음악은 평온하고 조용하며 그 배경으로는 파란빛의 바다를 뛰노는 흑인 아이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달빛이 아이들을 비추고 있는데, 이는 어린 시절 후안이 ‘리틀’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와 결부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결국 어린 시절 본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케빈을 만나면서 블랙은 하나씩 무장해제 된다. 케빈이 해준 밥을 먹기 위해 금속 치아를 벗겨내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가 살아온 삶과 속내를 이야기하게 된다. 케빈의 일이 끝나고 그의 집까지 같이 차로 타고 오며 케빈의 집에서 자기로 한 블랙은 차에서 내리며 다시 한번 파도 소리를 듣게 되고 그날 밤 케빈과 다시 한번 사랑을 하게 된다. 그 화면 뒤로 바다 앞에 홀로 서 있는 ‘리틀’이 등장하며 영화는 끝나게 된다.
이때 ‘바다’는 억눌린 성적 욕망을 표출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며 세상에 홀로 선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포괄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블랙’은 결국 ‘리틀’이 되며 영화를 처음으로 다시 끌고 가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장소도 ‘바다’라는 점은 ‘리틀’의 시기에 바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영화 전체를 통과하는 중요한 사건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리틀
리틀은 샤이론의 어릴 적 별명이다. 작고 왜소한 체격 때문에 사회로부터 호명 받은 이름인데 이때 샤이론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기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차오르는 어떤 감정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이루어지는 판단의 근거는 일차적으로는 내부, 가족 등에 의해 생기고 이차적으로 학교, 친구, 사회 등에 의해 생기게 되는데 우선 정상적인 가족의 부재를 가지고 있는 샤이론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없었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기에 학교나 친구들에게서도 소외되어 있다. 일명 사회화란 과정이 생략됨으로써 샤이론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내버려짐, 즉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유년기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배워나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후안이다. 대부 격인 후안과 함께 간 바다에서 샤이론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후안: (할머니 목소리를 따라 하며) 뛰어다니면서 달빛을 잡으려 하다니. 달빛을 받으면 검둥이들은 파랗게 보여. 파랗게 보여. 널 이렇게 부를게. 블루.
샤이론: 아저씨 이름은 블루인가요?
후안: 아니. 때가 되면 스스로 뭐가 될지 결정해야 돼. 그 결정을 다른 사람이 할 순 없어.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리틀’은 할머니가 후안에게 불러준 ‘블루’라는 이름과 동일시된다. 타인이 호명한 블루라는 이름 때문에 후안의 주체적 위치가 결정됐던 것처럼 ‘리틀’과 ‘블루’는 사회적으로 호명된 곳에 주체가 존재한다.
다만 성인이 된 후안이 더 이상 ‘블루’가 아닌 점은 리틀의 주체적 위치를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언젠가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체적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후안의 말은 리틀이 앞으로 가지게 될 이름들을 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기준점 역할을 한다. ‘블랙’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면의 죽음을 택한 이름이지만 그와 반대로 처음으로 샤이론이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비록 사회에 의해 세워진 젠더 개념에 상응하는 정체성이지만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리틀은 더 이상 리틀이 아닌 ‘아무것’, ‘무엇’이 되는 것이다.
리틀에게 바다에서 보낸 시간은 유일하게 외부적인 압박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블랙에게서 보인 바다는 순수한 본래의 정체성으로의 회귀와 함께 자신의 세상에 홀로 선 모든 이들을 위한 격려였다. 그가 케빈을 만나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남성성을 벗어낸 것과 리틀이 옷을 벗고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은 무관하지 않다. 리틀에게서 바다는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고 후안과의 교감, 자신의 내면을 나타낼 수 있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특히나 후안에게 배운 수영을 스스로 하며 앞으로 나가는 장면은 자신이 앞으로 헤쳐 나갈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바다의 색채 이미지인 ‘파란색’은 결국 한 인간을 둘러싼 외부적 압박과 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상징성을 가지는 이미지가 현실에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지는 영화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문라이트>에서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빛난다.’라는 말에서 파란색은 ‘평등’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소수집단이 겪어온 차별의 문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가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샤이론
케빈과 샤이론이 바다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샤이론: 넌 울어?
케빈: 아니, 그런 생각은 들지. 넌 뭐 때문에 우는데?
샤이론: 가끔씩 많이 울지. 내가 눈물방울이 된 것처럼
케빈: 그리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모든 엿 같은 것들이 슬퍼서 물에 빠지듯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샤이론: 왜 그렇게 말해?
케빈: 그냥 네 말 듣고 있잖아. 검둥아. 그렇게 하고 싶은 것처럼 들려서.
샤이론: 말이 안 되는 많은 걸 하고 싶어.
케빈: 말이 안 된다곤 안 했다.
사회의 통념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샤이론이 본인의 마을을 표현할 방법은 우는 것이다. 울음은 화가 날 때, 억울할 때, 슬플 때 혹은 기쁠 때 나오는 것이지만 샤이론에게 우는 것은 남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누리고 싶은 것 등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이다. 케빈은 그런 샤이론의 마음을 알고 그의 말을 받아치며 둘은 짧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우리가 지향하고 바라는 것은 사회적 평등이지만 결국 그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을 나와 같은 주체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념 속에 소수의 성향 또한 포함됨으로써 통념은 소수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통념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하나의 소수집단이 가지는 여러 정체성이 사회 통념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 가능한 것이 될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