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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꽃 Apr 15. 2023

조카를 돌보는 일이란

내 자식도 아닌 조카를 돌보는 일은 의외로 저항이 거세다.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걔 사춘기만 되어봐. 너한테 잘하겠냐?” 라거나 “나중에 걔는 기억도 못할 거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 낭비는 아니다. 가치 없는 일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치병에 걸려 거동하지 못하는 누나를 케어하는 남동생에게도 그런 말을 하는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에게도 그런 말을 하는지, 길가에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도 그냥 갈 길을 가는 편인지 묻고 싶다. 우선 나는 그렇지가 않다. 위층에서 때려 부시는 소리,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나면 학대는 아닐까 신중히 신고하고 길가에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켜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우려하는 그들조차 그 상황에 닥치면 절반은 그렇게 할 것이라 믿는다.​


물론 100일이 끝나자마자 아이를 어린이집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내 욕심이다. 기억조차 할 수 없더라도 아이는 어릴 때 형성된 애착으로 평생을 살아갈 것임을 알기에, 가능하다면 아이가 말을 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직접 돌봐주고 싶은 소신이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2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듯 조카를 돌보는 일도 어쩌면 허비하는 시간이 될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희생이 필요한 곳에 얼마든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다. 애 본 공 새 본 공이라고, 나중에 조카들이 기억도 못하고 사춘기가 와서 남처럼 대한다 하더라도 그런 건 정말이지 전혀 상관이 없다. 나도 그때 되면 내 인생 살아야지, 과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효도해! “ 이럴까. 사람들은 그런 기대를 하고 행동을 하나? 너무 속물이 아닌가, 아님 내가 멍청한 건가? 난 그저 아이들이 나로 인해 덜 울고 다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며 건강히 컸으면 좋겠다. 나도 아이들이 내 곁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다. 더 이상 유치원을 갈 때 울지 않는다든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든지, 할머니댁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든지. 누군가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찾으며 살아간다고 했다. 내가 가르치던 시간이 그랬고,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그렇다. 이들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그때의 난 마음 둘 곳 없이 어디를 떠돌며 살아갔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저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음에, 나의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품앗이는 비단 농업에서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아이는 어린이집으로, 노인은 요양원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회피해야만 하는 책임 속에서 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돌보는 일을 헛된 일로 인식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저출산을 피할 수 있을까? 청소하는 사람, 돌보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믿는 사회가 정말 제 기능을 다하는 사회일까? No Kids Zone,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아이를 싫어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회 속에서 내 가족을 직접 돌보고 싶은 욕심은 그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숙명이자 팔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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