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벌써 두 밤을 보냈다. 셋째 날은 인터콘티넨탈에서 메리어트로 리조트를 옮겨야 한다.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 측에 택시를 부탁하였다. 역시 유쾌하고 건장한 피지안 기사님은 호주에서 럭비선수로 생활하다가 피지로 돌아와서 결혼하고 아들만 넷을 낳았다면서 우리 보고 셋째 아이는 언제 나오냐고 묻는 것이다. 하하. 피지에 도착하여 처음 만난 택시기사도 뉴질랜드에서 럭비를 하다가 돌아왔다고 하던데 우연인 것일까 아니면 럭비선수들이 많은 것일까. 이동하는 중에 작은 마을들이 한 번씩 나오는데 벌판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축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기사님 말씀으로는 피지 사람들은 주말마다 축구와 럭비 경기를 번갈아가면서 한다고 한다. 그럼 기사님은 럭비 감독 같은 관련된 일도 하시냐고 물었더니 아들 넷 때문에 기력이 없어 못한다고. 기사님이 살고 있는 마을에 스무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 그의 가족이 6명일 테고 마을에 세 가구 정도밖에 안 산다는 것일까.
어느덧 우리는 메리어트 리조트에 도착하였고 햇살이 좋은 맑은 날씨이다 보니 또 새 리조트가 어찌나 좋아 보이 던 지, 다시 한번 J*항공사가 원망스러워졌다. 두 리조트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인터콘티넨탈은 숙소들이 해변가에 옹기종기 모여있어 수영장이나 식당 시설들을 걸어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메리어트는 인공 라군을 둘러싸고 뜨문뜨문 방갈로들이 있고 방갈로 앞의 해변을 프라이빗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부지가 넓어 시설들을 이용하려면 계속 카트를 불러야 해서(물론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힘들다) 수영장을 한 번밖에 이용하지 못했다.
어쨌든 알차게 놀다가 룸에 돌아왔는데 음,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다. 직원이 와서 보고는 지금은 고칠 수 없다고 휴일이라 다른 방이 없을 것 같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러고 나니 갑자기 너무 습하고 꿉꿉하고, 비싼 돈 주고 잘 쉬러 왔는데 왜 쾌적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다시 전화해서 방이 있음 옮기고 싶다고 계속 있다 보니 불편한 것 같다고 말을 바꿔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카트를 불러 휴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리조트 인피니티 풀 옆에 위치한 노천 레스토랑에 앉아 저 멀리 수평선으로 해가 지며 생기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곳곳에 횃불을 켜주고 노래를 불러주니 휴가의 마지막 밤을 정말 잘 보내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꿉꿉한 룸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느긋이 즐기다가 천천히 걸어서 룸을 향해 걷다 보니 카트 타고 지나가던 직원이 우리에게 먼저 아는척하며 방을 옮기자고 한다. 방이 없어서 기존 방보다 두배로 넓은 스위트로 옮겨주겠단다. 미안하니까 오늘 저녁 식사한 거 무료로 해주겠다며 룸서비스도 시켜 먹으란다. 아, 이렇게 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자본주의 노예.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돈 아끼지 말고 더 좋은 거 먹을걸.
다음날, 늦은 밤에 들어와서 몰랐던 창밖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새벽에 리조트 한 바퀴 산책하고 들어오니 오전부터 어찌나 강렬한 햇살이 내려오는지, 에어컨 없이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기도 했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꽉꽉 채워 빈둥거리다가 공항으로 이동했다. 우리 가족은 무언가 열심히 보러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빈둥거리며 쉬다가는 휴양지 여행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이번 피지 여행을 마지막으로 향후 몇 년간 더 이상 장거리 여행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