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筆 라디오 003
가방을 탈탈 털었다. 백사장을 밟고 돌아온 운동화처럼 온갖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깨끗해진 가방 안에 노트북도 넣고 일기장도 넣고 책도 넣었다. 다시 꺼냈을 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종잇장에 숨은 알갱이도 없었다. 나도 가방이고 싶었다. 말이 넘친 날에도, 말이 모자란 날에도. 깨끗하게 털어내고 다시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런 가방. 말은 자주 후회를 동반했다. 나처럼 생각을 멈추거나 말을 못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하기 대신 글쓰기에 마음이 기울면서, 이유도 모른 채 쓰고 싶은 날이 그냥 막 찾아왔다. 그러나 ‘그냥’은 우유부단해서 끝을 짓지 못했고 ‘막’은 산만해서 이야기를 방해했다. 어느덧 살아있는 메모보다 휴지통 속에서 완전히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메모가 더 많아졌다. 그것들을 보며 나는 그 무엇도 아니면서 시간을 내어 글을 쓰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가방을 떠올린다. 부스러기를 탈탈 털어낸다. 한결 산뜻해진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연유 없이 그냥 막 계속되어야 한다.
2025.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