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아빠였니?"
세 남매의 아버지인 김상식(정진영 배우)은 불의의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기억이 20대에 멈춰 어느새 자신의 나이보다 훌쩍 커버린 자식들이 낯설기만 하다. 김상식은 자신에게 데면데면한 아이들을 보며 걱정이 밀려온다.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은 아빠였냐고. 드라마가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저 한 문장은 가슴 한편에 콱 박혀 시시때때로 나를 찔러 온다.
또 한 번의 퇴사를 결심하고 나서 부모님과 술잔을 기울이던 날이었다. 자랑스럽지 못한 모습만 보인다는 죄책감에 눈물만 주룩주룩 뽑아내고 있었다. 연거푸 술잔을 비워내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나와 내 친구를 데리고 계곡으로 갔다. 당시에 우리 집은 차가 없었다. 아빠는 수박 한 통에, 텐트에 온갖 짐을 이고 지고 어린아이 둘까지 양손에 잡고 버스를 타고 계곡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회사일 때문에 늦는다고 했다. 한참을 놀고 있는데 친구의 아빠가 '코란도'를 타고 나타났다. "아빠, 내 친구 아빠는 공장장이래." 그때의 나는 '코란도'가 뭔지, '공장장이' 뭔지도 모른 채 친구들이 떠드는 그대로 읊어댔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에게는 비수가 되었다. “그때 종일 텐트 치고 같이 수영하며 놀아준 아빠는 순식간에 사라지더라. 코란도 타고 온 친구의 아빠만이 남겨지더라고.” 나에게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날 이후 아빠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어야겠다.
그렇게 아빠는 '괜찮은 아빠'가 되어주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자랑스러운 것이, 괜찮은 것이 대체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결과는 대성공이라 해야 하나. 단순히 좋은 차가 생기고, 높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다. 딸의 전용 기사가 되어 전화 한 통이면 언제든 달려와 주었다. 함께 쇼핑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친구도 되었다.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부러운 아빠’로 통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매일 운동을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공부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물론 술자리도, 골프모임도 열심히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니 아빠의 하루 일상이 마냥 대단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언제, 어디서나 주저 없이 아빠를 얘기하곤 한다.
이런 아빠에 비해 과연 나는 과연 '괜찮은 딸'이었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딸 명문대 졸업했어. 대기업 다녀. 이거 우리 딸이 사준 거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원인 제공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서라도 ‘나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아빠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께 묻습니다. 우리 아빠는 딸에게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부러우시죠?
영국 유학 시절, 내로라하는 금수저들 사이에서 ‘대 2병’이 발발했다. 한국에 기업이 이렇게 많은가 싶을 정도로 한국 학생들의 반 이상은 졸업 후에 아빠 기업을 물려받는다고 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남’ 출신이며 알지도 못하는 강남 8 학군 학교와 고급 브랜드 아파트 이름이 난무하는 대화에는 낄 수도 없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금수저, 태초부터 피아노 영재인 금수저, 축구 실력 하나로 영국 학생들을 휘어잡은 금수저,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국비 장학생이 된 금수저, 하다못해 외모로 사람 기죽이는 금수저까지 온갖 금수저들의 집합이었다. ‘나는 대체 뭘까. 노래도 못해. 그림도 못 그려. 운동 신경은 꽝이고, 머리도 심각하게 평범해. 세상이 공평하다는데 과연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일까?’
대 2병이 중증으로 치닫던 어느 날, 친구의 샤* 쇼핑에 동행했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 나는 이런 금수저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샤*넬을 학교 가방으로 사는 금수저들과! 아무런 걱정 없이, 아르바이트 한 번 한 적 없이 영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빠, 엄마의 덕분이다. 아빠, 엄마가 열심히 일구어 낸 밭을 양심도 없이 홀라당 털어 먹었다. 아, 나는 정말로 과분한 인생을 살고 있구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열렬히 고민하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신은 나에게 아빠, 엄마를 주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세상은 정말로 공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