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인생 처음으로 침대를 갖게 되 었다. 침대가 들어갈 수 있는 넓직한 방이 있는 새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면서였다. 인생 첫 침대는 말 그대로 ‘공주 침대’ 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의 침대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고, 네 모서리에는 둥글게 조각된 기둥이 달려있었다. 스프링이 어쩌구 하는 에**니 시**니 같은 침대를 마다하고, 요즘 은 초등학생들도 기피할만한 침대를 고른 것에 아빠는 계속 불만이었다. 아빠의 불만은 귓등으로 넘겨버리고 한 술 더해 디즈니 공주 캐릭터가 가득한 핑크색 시트를 덮었다. 그동안 숨겨왔던 침대에 대한 로망이 마구 튀어나왔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짐도 다 풀지 않은 새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했다.
“여기가 내 방이야! 내 침대 이쁘지!”
이렇게나 애정을 듬뿍 담은 침대 위에서의 행복한 시간은 겨우 1년이었다. 대신 몇 명이나 거쳐갔을지 모르는 대학교 기숙사의 딱딱한 매트리스로 만족해야했다.
빈 침대는 곧장 아빠의 차지가 되었다. 잔뜩 술에 취한 날 이면 내 방으로 곧장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문 열리 는 소리는 났는데 어째 들어오는 기척이 없어 나가보면, 아 빠는 핑크색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고 했다. 눈물을 펑 펑 쏟아내면서 말이다.
‘공주처럼 키울 수 있었는데, 공주처럼 키우고 싶었는데......’
'혼자 있으니 좋냐. 그래서 행복하냐.'
당연히 얼른 씻고 자라는 엄마의 채근이 통할 리 없었다. 꼼짝하지 않는 아빠에게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티슈를 건네는 일뿐이었다. 엄마의 100번째 레퍼토리가 시작되면 아빠는 '내가 언제 그랬냐' 하고 말을 끊어버린다. 티비를 보며 괜히 딴청을 피우는 아빠를 두고 엄마와 나는 '아빠 울 었대요, 울었대요.' 놀리며 그저 웃어 넘기곤 했다.
덩치 좋은 다 큰 사내가 까만 정장을 입은 채로 핑크색 공 주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무게가 눈에 보이는 듯 했 다. 영화 배우 못지 않은 태평양 어깨를 자랑하던 젊은 날의 사진 속 모습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가장의 무게’는 나에게 서 비롯된 걸까? 그제사 깨달았다. 나는 18년만에 침대를 갖 게 되었지만, 아빠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기 방, 자기 침대를 가질 수 있었다. 아빠는 자신의 방과 침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은 차가운 길에서 쪽잠을 자는 한이 있더라도 딸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지켜주 기 위해 손과 발이 피투성이 되더라도 아랑곳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쌓아 올린 성 안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 는데 아빠는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나는 이 렇게 받기만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다 감당해야할지 조금은 두렵다. 나를 지키기 위해 끝이 보 이지 않는 밤을 계속 걸어왔을 아빠가 이제는 잠시 쉬었으면 한다. 아직은 택도 없이 멀어보이긴 하지만, 나도 언젠가 아 빠를 지킬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직도 아빠가 나를 공주처럼 키우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공주다. 공주 침대를 가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