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로 ( )을 말하다. 그리고 그리다.
지난 밤거리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댔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도록 바람이 휘몰아쳤다. 대단한 바람이었다. 바깥바람이 드나들며 식어버릴 대로 식어버린 집. 샷시 사이로 바람이 휑하니 통하는 화장실은 바깥과 다름없는 온도였다. 벌거벗은 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을 피해 뜨거운 물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웠던 몸은 금세 달아오르고 푸른빛이 감돌던 피부에 붉은 생기가 드러났다.
지난밤처럼 유독 뜨거운 물줄기가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언 몸을 녹이기 위해 화장실에 오랜 시간 서 있는다. 물이 좋아서도 있지만 따뜻한 물줄기 속을 벗어나기 싫어서, 더 정확히 말하면 화장실에 가득 찬 찬바람을 느끼기 싫어서. 그래서 오랜 시간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서 있는다. 이른 아침 찬 공기에 따뜻한 이불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내겐 물줄기를 맞는 순간이 그렇다.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따뜻한 물줄기를 가만히 맞고 서 있는다.
사실 익어간다는 걸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다. 거울에 비친 가슴팍에 붉은 열꽃이 피는데 어떻게 익어가는 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가슴팍에 불긋한 열꽃이 피어도, 물줄기의 따뜻함이 따끔함으로 확신하게 되는 순간에도. 명확한 고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
명확한 고통. 붉어져버린 가슴팍.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은 고통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어떤 물줄기 속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