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일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날까지 우리 서로를 잊지 마. 잘 가, 안녕
2022. 04. 16 날씨 좋은 토요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처음으로 보았다.
17일까지가 공연이었기 때문에 해당 공연은 나의 첫 공연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이 공연은 최근 들어 망태기에 들어오신 임별 배우님과 안지환 배우님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며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마침 이 두 분이 페어로 올라오는 날의 공연을 우연히 기회가 되어 충동스럽게 관람을 갔다. 그래서 이 공연에 대해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사람으로서의 감상에 대해 남기고자 한다. (프로그램북마저 품절이었기에 무대 및 조명, 가사에 대한 내용이 불명확할 수 있습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하 날치)는 헤르만 헤세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이중성과 평행선이었다. 좁고 작은 무대의 양끝은 두 개의 공간이 된다. 왼쪽의 촛대가 있는 공간은 신의 공간, 그리고 오른쪽의 아치 너머 나무들이 있는 곳은 인간의 공간. 그리고 나르치스는 시종일관 검은 머리에 검은 사도복을 입고 등장하고, 골드문트는 금발의 머리를 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둘에게 핵심적으로 작용되는 조명의 색상은 차가운 푸른 조명과 따뜻한 느낌의 노란 조명이다. 나르치스는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골드문트는 어머니를 이야기한다. 천주교라는 같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둘의 접근성은 달라진다. 나르치스는 신에게 귀의한 인물로 골드문트는 신에게 귀의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고 예술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인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 의해 금빛 새로 불리는 존재로 말 그대로 새의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 나르치스는 꼭 새장 같이 그려진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자신의 길이라고 믿는 새장. 하지만 그 새장을 녹이는 불타오르는 존재가 골드문트였던 것이 아닐까? 그저 작고 유약한 금빛 새 같은 골드문트는 어쩌면 불타오르는 불사조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불길에 휩싸여 자신마저 불태웠고, 차갑고 삭막한 세상에 살던 나르치스를 녹여 사랑을 알게 했으며,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품들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된 존재이니 말이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는 분명 다르다. 먼저 다름을 알아본 사람은 나르치스였으나 마지막에 나르치스가 가지고 있는 결핍을 알아봐 주고 그 결핍을 채운 존재는 결핍으로 가득해 보였던 골드문트였다. 둘은 꼭 손을 잡고 걸어가는 존재들 같았다. 팬레터에서 해진과 세훈은 세훈이 뒤에서 걸어가 서로를 보지 못해 일어나는 비극적인 결말이라면 날치에서의 둘은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각자가 앞만 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결말인 것 같았다. 서로가 손을 잡고 있을 만큼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고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이지만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서로가 다르다고 여기는 사이 같았다. 문제는 이 둘이 각자가 뒤에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서로가 마주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보내고 뒤에 남아있다 여기는 것 같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동경의 대상과 신의 눈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둘이 나란히 걷고 있음에도 나란히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끝에 다다라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작별’ 넘버에서 내내 둘이 마주하지 못하다가 극의 마지막에 가서야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은 정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마 이 둘이, 특히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와 자신이 다르다고 여긴 것은 신의 존재 때문이리라. 극 내내 신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종교를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해볼 법한 생각, 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페스트에 대한 언급과 레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골드문트는 끝없이 신을 원망하며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각가가 등장하는 극이기에 보는 내내 미켈란젤로가 떠올랐다. 그의 삶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그가 예술을 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가 수도원에 버려졌던 것은 아니지만 마리아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조각가가 등장하는 이상 나는 그의 마지막 피에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은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정교함의 극치를 달린다. 옷 주름 하며 옆구리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까지 마치 사람이 돌이 된다면 이런 느낌 일까 싶다. 그런데 그의 말년의 작품인 피렌체의 피에타와 밀라노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아직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보지 못했기에 피렌체의 피에타를 이야기하자면 정교함은 뭉툭함이 되어있다. 완벽했던 성모의 얼굴은 그저 형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방에 홀로 있는 그 조각을 바라보노라면 그곳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알 수 없는 벅참이 느껴지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한 마리아상을 바라본 나르치스의 마음이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 공연을 보는 내내 들었다. 그래서 만약 골드문트가 수도사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수도원을 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 조각가 혹은 종교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하여 나르치스 곁에 남았다면 그 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깨달음만을 던져준 채 떠나버린다. 이에 괴로워하던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를 괴롭히던 물소리가 들리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과연 그 깨달음과 괴로움을 가지고 나르치스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떠올리며 요한을 만들었듯, 나르치스가 골드문트를 떠올리며 마리아를 완성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지나친 해석이겠지만 말이다. 그저 나르치스가 너무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게 된다. 하얀 겨울 안에 너무 오래 있지 않기를, 따뜻한 금빛 새가 사라져 차갑고 삭막한 푸른빛 아래에만 있지 않기를 바라본다.
극이 결말로 가면서 골드문트는 아이였다가 냉소적이었다가 어느새 죽음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되었고, 오히려 먼저 앞서 신의 눈을 통해 본질을 들여다보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의지할 수라도 있었고, 그가 다시 조각을 하게 등 떠밀어줄 존재가 있었는데 그런 존재가 없는 나르치스는 과연 골드문트가 떠나고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과연 마지막에 들린 물소리가 그의 고뇌의 시작일까 혹은 깨달음의 시작일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나르치스의 마지막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늘 기억하여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고,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을 이야기하는 문장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골드문트는 죽음을 받아들였고,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하던 나르치스는 사랑하는 골드문트의 죽음을 겪게 된다. 골드문트가 수도원에서 다시 한번 떠나며 ‘나는 이제 이별이 두렵거든요’라고 말하는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나르치스가 되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았을까. 혹은 작별 넘버에서 싱긋 웃으며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친구야’라고 말했던 것처럼 담담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까. 축복을 바랐던 골드문트와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어주던 나르치스 두 사람 모두가 마리아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허상과 허무로 지친 두 사람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잘 가, 안녕 나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